2002년 6월 한반도 남단은 온통 붉은색 물결이다. 이 붉은색은 과연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흘러왔을까. 김복희 전주대 객원교수(독문학)가 ‘색깔의 힘’(Die Macht derFarben)이란 책을 곧 번역 출간할 계획이어서 눈길을 끈다. 저자는 독일의 디자이너 겸 색 이론가인 하랄트 브렘. 저자는 이 책에서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초록색 등 11가지 색깔에 관해 유럽에서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논했다. 그 중 붉은색에 관한 것을 요약 소개한다. 그동안 발표된 붉은색에 관한 글들이 주로 정서적 심리적인 것이었다면 이 글은 붉은색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다뤘다.
▽인류의 원초적 색깔〓원시시대에 사냥꾼들이 한 마리의 물소와 사투하다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동료를 목격한다. 그들에게 붉은색은 생명의 색깔로 각인된다. 동굴로 돌아온 사냥꾼들은 불을 지펴 물소를 구으면서 붉은 불빛의 생명력을 응시한다. 그들은 넘실거리는 불길과 함께 누군가와 춤 추고픈 충동을 느꼈을 것이고, 그건 육체적인 사랑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권력과 권위, 부의 상징〓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딸들은 값비싼 붉은색으로 볼 입술 손톱 등을 치장했다. 부의 과시였다. 고대 로마에서 붉은색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붉은색의 토가(고대 로마인들이 입었던 긴 상의)는 최상층의 원로원 멤버만이 입을 수 있었다. 로마제국에서는 국가가 붉은색 생산을 독점했을 정도였다. 붉은색은 전쟁의 신인 마스(Mars)의 색깔이기도 했다.
사형 집행인들은 붉은 관복을 입었고, 추기경과 왕은 지배자로서의 징표로 붉은 외투를 입었다.
▽집단의 힘〓붉은 색은 또한 군집을 이루는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투우사들이 사용하는 붉은 천이다. 프랑스 혁명 때엔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펄럭이는 붉은 군기(軍旗)는 훨훨 타오르는 불길의 모습으로, 군중을 자극하고 단호한 결단력을 유발했다. 사람들은 붉은색 모자를 쓰거나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 집단 소속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정치적 불화의 씨앗〓중세 유럽에서 붉은색은 정치적 불화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농민전쟁 기간 동안 누구에게나 붉은 상의를 입도록 강요하자, 붉은 색 상의를 독점했던 귀족들들이 붉은색을 평민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해 일으킨 반발이었다.
▽붉은색의 상징적 의미〓붉은색은 힘, 삶의 기쁨, 역동성을 상징한다. 피 빛깔의 붉은색은 가장 능동적, 매혹적, 암시적인 색깔이다. 정복자와 군주의 권위를 보증한다. 또한 부와 행운을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비록 자극적이고 투쟁적인 면도 있지만 유럽에서 붉은색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