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10)]탑골과 북학파

  • 입력 2002년 6월 23일 17시 32분


서울 종로 2가 한복판에서 한발짝 슬쩍 물러서서 좌우의 번화한 종로풍과 사뭇 다른 모습에 눈길을 주다 보면, 친숙하게 와 닿는 조그만 공원이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원으로 3·1운동의 발원지이자 한동안 ‘파고다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던 ‘탑골공원’. 그 안에는 도시의 매연과 비둘기에 시달려 노쇠한 몸으로 이제는 유리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늘쌍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거리의 사람들을 묵묵히 건너다보는 ‘백탑(白塔·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다.

지금은 우리 시대의 쓸쓸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노인들의 휴식처가 돼 있지만, 한때 그 주변은 당대의 총명한 젊은 인재들이 모여 학문과 예술을 논하고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던 ‘담론의 산실’이었다.

백탑 인근에 박지원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과 초정 박제가(楚定 朴齊家·1750∼1805)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박제가의 나이 18세. 이미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박지원의 명망을 듣고 흠모하던 박제가가 그의 집을 찾아갔다. 박제가의 재능을 익히 듣고 있었던 박지원은 버선발로 뛰어나왔고 이 둘은 첫눈에 의기투합해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 속에 그날 밤을 지샜다. 이 때 박지원의 나이는 31세. 이 무렵 박지원의 집에는 이미 인근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풍류를 즐기며 시대를 논하곤 하던 터였다.

전의감터와 그 뒤의 우정총국

이들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어울렸고, 하루도 안 만나고는 배기지 못했다. 박제가는 신혼 첫날밤을 박지원의 집에서 이 무리들과 함께 지새기도 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당대에 정권 핵심에 버티고 있는 권문세가 노론(老論)의 일족이었고, 박제가는 벼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서얼 출신이었다.

박제가뿐이었겠는가.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유련, 이희경 의명 형제 등이 모두 함께 어울렸던 서출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1731∼1783)은 박지원과 같은 노론 가문 출신이었고, 이조 공조 호조판서 대사헌 평안감사 호남감사 등을 두루 거친 이서구는 왕가의 종친이었으며, 서유구도 대대로 벼슬을 해 온 소론(少論)의 명문 출신이었다.

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이들이 유별난 신분개혁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이 이들의 활동무대였던 수도 서울은 가장 활발한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다.

18세기.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제제도와 계급질서의 붕괴 등 산적한 사회 문제로 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떤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오랑캐라 천대받던 만주족이 중원에 청나라를 세우고는 예상 밖으로 나라를 잘도 꾸려 가고, 서구의 문물이 중국을 통해 조선에 조금씩 전해지면서 중화주의적 세계관도 흔들렸다. 청나라의 번성함과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발달된 문물은 조선의 지식인들 스스로를 끊임없이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제 중국 한족(漢族)의 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문화민족과 오랑캐의 이분법적 구도가 재검토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지배층인 양반들의 무능함이 확인되고 평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몰락한 양반이 속출하던 터였으니, 서울 장안의 젊은이들이 신분의 벽을 넘어서 어울리는 것은 그다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이 같은 문제를 성리학적 심성론(心性論)의 측면에서 논한 것이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이었다면, 백탑 주변에 모인 이들은 예술, 역사, 경제 등 다양한 방향으로 논의를 거듭했다.

백탑 주변에서 어울렸던 이들 젊은 지식인들은 현실의 변화 앞에서 당시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여겨지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넘어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그 희망은 우선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청나라의 실용적인 문화였다.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은 청나라를 직접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교통통신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몇 달씩 걸리는 중국 여행의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돈이 있다고 아무나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선진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때로는 집안 덕택에, 때로는 친구 덕택에 청나라로 가는 사신일행에 끼어서 청나라를 직접 구경할 수 있었고 청나라에서 본 선진문물의 수용을 적극 주장하게 된다. 이들은 당시 그렇게 어렵다는 ‘외국 물’을 일찍부터 먹은 장안의 ‘유학파’들이었다.

길거리 사람들의 옷차림, 농기구 하나 하나의 효율성, 벽돌 한 장, 수레바퀴의 모양…. 조선 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 박지원의 사랑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했던 그들이기에 청나라의 거리에서 언제나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조선의 문제를 해결할 실용적인 기구들과 청나라 문물의 효율성이었었다.

먼저 청나라에 갔다온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北學議)’를 보고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비 오는 지붕, 눈 내리는 처마 밑에서 연구하고, 또 술을 데우고 등잔 불똥을 따면서 손바닥을 치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양반들의 허례허식과 비효율적인 경제 운용을 함께 비판했던 이들이기에 청나라의 실용적인 생활 모습은 분명한 대안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밖에도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의산문답’ 등 청나라 방문의 성과들은 외래문물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 조선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대를 논하면서도 문학과 음악을 즐기며 당대 지식인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던 그들의 자리. 이제 그 탑골 앞에는 바쁘게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 그리고 세계화를 외치는 외국어학원과 패스트푸드점들만 즐비하다.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해 조선어 대신 중국어를 쓰자고 주장했던 박제가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홍대용-박지원이 북학파에 미친 철학적 영향▼

석실서원터

18세기 후반 백탑 주변에 모여들었던 일군의 지식인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 일컫는 것은 이들이 청나라를 비롯한 외래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주장을 펼친 이면에는 기존의 조선성리학에 대한 전반적 반성을 토대로 자연관, 인간관, 세계관 등에 걸친 폭넓은 철학적 입장의 변화가 있었다. 이런 철학적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홍대용과 박지원이다.

경기 남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의 가르침을 받아 10여 년간이나 정통 조선성리학을 공부한 후 이 지식인 집단에 적극 가담한 홍대용은 조선후기 성리학으로부터 북학사상이 형성돼 간 궤적을 잘 보여 준다.

한편 박지원은 철학자라기보다는 당대의 문장가였지만 자유분방한 그의 예술가적 시선으로 고정된 문체와 철학의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다양한 문장 속에 담아 냈다.

우선 두 사람은 땅은 둥글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조선을 비롯한 지구상 어디든지 지구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수백 년 간 내려 온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론(小中華論)을 벗어날 수 있는 사고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홍대용선생생가지

이들은 지구가 돌 듯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해야만 소멸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런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고 수용하려 했다.

박지원은 인식틀이나 분석틀이 기존 세계를 위한 편견이라고 생각하며, 고정된 편견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 전체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강조했다.

홍대용 역시 인간이 필요에 의해 설정한 범주로 우주를 규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의 인식에 장애가 된다며 인간 중심의 관점이 아닌 자연 중심의 관점(以天視物·이천시물)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

또한 북학파가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의 문물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이면에는 이 두 사람이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에서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주장했던 노론(老論) 낙학파(洛學派)를 계승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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