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설가 故한무숙씨에게 바치는 '思婦曲' 펴낸 김진흥옹

  • 입력 2002년 6월 24일 18시 29분


아내 한무숙씨의 사진 앞에 앉은 김진홍씨와강아지 '미미' [사진=신원건기자]
아내 한무숙씨의 사진 앞에 앉은 김진홍씨와
강아지 '미미' [사진=신원건기자]
# 시작

긴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노란 표지의 책 한 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출판사에서 책을 두고 가는 일이 더러 있어 심상히 넘겼다. ‘여가(餘暇)’(김진흥 지음·신지성사)라….

턱을 괴고 붓글씨로 쓰여진 제목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그즈음 일 때문에 참석한 자리에서 우연히 들은 얘기.

“소설가 한무숙의 남편이 홀로 지내며 아직도 아내를 많이 그리워한다더라.” “아직도 아내 얘기를 하면 눈물을 흘린다지?”라는.

며칠 뒤, 소설가 한말숙씨에게 e메일이 왔다.

“한무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86세의 형부가 그림 수필집을 냈습니다. 제 둘째 언니인 작가 한무숙은 93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형부가 48세 때 은행장이 되자, 언니는 ‘지금은 재벌들이 새벽부터 문전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행장 그만두면 찾아올 사람도 없을테니 노후를 대비하라’며 서예와 그림에 취미를 가져보라고 권유를 했었답니다.”

갖가지 얘깃거리들을 담고 있을, 쌓아둔 책더미를 살펴 노란책 ‘여가’를 찾아냈다. 흩어진 기억의 퍼즐조각들이 모여, 여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한무숙 기념관 가는 길

1948년 장편소설 ‘역사는 흐른다’로 국제신문 현상소설 공모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한무숙.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그린 ‘만남’을 비롯, ‘생인손’ ‘빛의 계단’ 등 문학팬들의 뇌리에 길이 새겨질 작품들을 남겼다. 역사 속의 인물의 삶을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탁월하게 재구성해 온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93년 1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편 김진흥씨만이 서울 종로구 명륜동 한무숙기념관을 지키고 있다. 기념관은 곧 그의 집이기도 하다. 6월 말, 한무숙기념관으로 가면서 기자는 김옹과의 전화통화를 떠올렸다. 그의 귀가 어두워 다시 묻고, 확인하고 대답하는 끝에 약속을 정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아내와 함께 산다

단아한 한옥, 반질반질 길들여진 나무 바닥의 대청에서 김옹과 마주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 차소리,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공간이지? 이제 ‘여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북적대기 이를 데 없는 대학로에서 조금 벗어난 이 곳에서 그는 무척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광복 후 60여년 가까이 이 집에서 산 게야. 집사람이나 나나 ‘문화주택’ 같은 ‘새 것’을 싫어했거든. 아무데서나 살다 죽으면 되지. 사는 것, 그거 잠깐이야. 호화롭게 더러운 돈 가지고 살지 말아. 가치 없어.”

간암으로 벌써 4년째 투병 중인 그가, 가쁜 숨을 쉬며 일어섰다. “우선 기념관을 둘러 볼테야? 이리 와.”

한씨가 생전에 쓰던 화장품이 낮은 자개 화장대 위에 엷은 먼지를 쓰고 있었다. 시계 접시 의자 하나하나마다 깃든 사연을 모두 얘기하는 것은 건강이 허락지 않는다고 김옹은 말했다. 그는 2시반에 바늘이 멈춘 시계를 들었다.

“집사람이 오후 2시반에 하늘나라로 갔거든. 그이가 떠난지 몇 일뒤 이 시계가 멈춰 버렸어. 오후 2시반에.”

짧은 말 끝에 긴 침묵이 이어진다.

한씨는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 천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한 슬리퍼와 옷가지, 가족 및 지인들과 주고 받았던 수백통의 편지. 그리고 김옹의 가슴에 새겨둔 깊은 흔적까지.

“하루종일 앉아 있으면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프고 쓸쓸해. 90이 다 된 이 노인의 슬픔을 어떻게 생각해? 허허.”

“지금도 여전히 우리 집사람 사랑하지. 잠깐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진 기분이야.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야(한무숙씨는 ‘객관적’으로 미인의 범주에 속한다). 허황되지 않고, 검소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가진 그 한무숙을 난 기억해.”

“은행장 시절에 바쁘고, 문학에 관심도 없고 해서 집사람 책을 그이 생전에 1권도 안 읽었어. 죽은 뒤에 그 많은 책을 다 읽었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슬퍼만 하지 않고 참으려고 그 때부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어.”

“하루하루 지나는 것이 집사람에게 점점 더 가까이 가는 일이기는 한데, 나중에 꼭 만날 수 있을까? 하늘에 가도 번지수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요즘엔 의심도 되고 슬픈 마음도 생기고 그러네.”

“늙어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게 아니야. 권솔(眷率·한집에서 거느리고 사는 식구)에게 불행이 오는 것을 보고 듣는 것과, 하루하루 지루한 여가를 보내는 것이지.”

탁자 위에 놓인 ‘6월 전기요금 자동납부 해지 안내서’에는 아직 ‘한무숙’이라는 이름이 검은색 활자로 찍혀있었다.

# 끝

다시 ‘여가’라는 단어가 마음을 아프게 건드린다. ‘한가로움’이라는 뜻과 자연스레 연결이 되는 그런 ‘여가’가 아니라,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텅빈 공간에서 홀로 떠안아야 하는 ‘그만의 여가’를 알기 때문이다.

# 덧붙여

7월 6일 오후 5시 서울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도서관에서는 이날 도서관 내에 문을 여는 세계여성문학관 한무숙코너의 개설 기념행사가 열린다. 한무숙재단은 한무숙씨가 소장하고 있던 책 5000여권을 숙명여대에 기증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