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월드컵후유증 시달리는 사람 많다

  • 입력 2002년 6월 26일 18시 14분


귓전에서는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 응원가만 맴돈다. 한국의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월드컵이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자 벌써부터 일이 손에 안 잡히고 허탈감이 밀려온다.

회사원 박종국(朴鍾國·29) 대리는 한국과 독일의 4강전이 있은 다음날인 26일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거의 일을 못했다. 박씨처럼 월드컵 후유증에 시달리며 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다. 아직 3, 4위전이 남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무 낙이 없던 ‘한달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두려워하고 있다.

용인정신병원 하지현(河智賢) 박사는 “사무실에 앉아서도 응원가나 구호를 환청처럼 생생하게 느낀다면서 자신이 정상인지를 문의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의학자들은 집단 응원이 시민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았던 갈등 요소를 표출하고 응어리를 푸는 긍정적 역할을 했지만 갈등 요소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유증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 권준수(權俊壽) 교수는 시민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공명(共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공명 현상은 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면 각자의 뇌 신경회로가 일정한 주파수로 진동하며 이들 주파수는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울림은 공유한 사람의 규모와 세기 등에 따라 지속기간이 결정되는데 이번의 경우 이 현상이 매우 컸기 때문에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공명된 내용이 현실과 괴리가 크면 나중에 현실 생활로 돌아왔을 때 더 큰 애로를 겪는다는 것.

하 박사는 “월드컵 후유증은 음악가가 장기 공연을 마치고 난 뒤 흔히 발견되는 증세와 같은 범주의 정신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즉 음악가가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질이 다른 고양된 감정을 체험하면서 연주하다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몸살 우울증 상실감 등을 느끼기 십상이라는 것.

하 박사는 “축구 선수가 아니라 관객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마당극’에서 관객이 배우와 동일화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면서 “관객도 거대한 퍼포먼스에 참여한 뒤 탈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학자들은 이런 후유증은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월드컵 4강 달성이 우리 현실을 갑자기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부모들은 그동안 축구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었던 자녀들이 갑자기 일상으로 복구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거스 히딩크 감독과 우리 선수들의 월드컵 준비 과정 등을 예로 들며 자녀들이 자신감 있게 현실로 돌아오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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