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내내 나라를 뒤덮은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예술의 전당은 유난히 많은 공연을 치르느라 애를 먹었다.
1년 이상 준비한 ‘말러 콘서트’는 하필이면 이탈리아와의 8강전과 ‘맞고희경 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장붙었고’ 스페인과의 4강전이 열린 바로 그 시간에는 스페인국립무용단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끝내는 3, 4위전마저 한국과 일본이 합동으로 만든 연극 ‘강건너 저편에’ 마지막 공연과 같은 시간이 되었다. 우리 축구대표팀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월드컵 열기는 공연에 큰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축구 강국을 상대로 거침없이 종횡무진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과 광화문 사거리에서 어떤 거리낌도 없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승리를 만끽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영낙없이 말도 안되는 ‘신파’로 몰렸을 법한 얘기들이 우리 앞에 생생한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래서 감동과 환희가 배가된 각본 없는 대하드라마였다. 상처와 강박의 흔적이 없는 건강하고 생생한 한바탕 축제였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2막 마지막 장면도 감동적이다. 형사 자베르가 죽고 장발장의 혐의가 벗겨지면서 학생 대중과 민중들이 승리를 축하하며 부르는 코러스씬이 압권이다. 그러나 나는 정의가 승리하는 뮤지컬의 저 장면이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씌어진다면 리얼리티가 없는 신파가 될 것이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승리한 혁명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와 그 역사를 토대로 거침없는 작품을 써내려갈 수 있었던 빅토르 위고가 부러웠고 비극적인 결말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태백산맥’의 조정래가 가슴 아팠다. 우리의 리얼리티는 언제나 유보된 승리이거나 곧 허물어질 정의로 존재했다.
황석영의 ‘손님’은 우리 아픈 리얼리티의 대표선수라 할 만하다. 이 ‘손님’은 월드컵이 한참인 지금 우리가 맞는 ‘손님’들이 아니다.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가지게된 모더니티로서의 맑스주의와 기독교이다. 이 ‘손님’들은 한국전쟁 중에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처참한 양민학살 사건의 두 배경이 된다. 작가의 리얼리즘은 고통스러워 잠재워둔 마음 한 구석을 자극해서 깨워낸다. 우리 역사의 리얼리티는 뼛속까지 스치는 아픔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벌어졌던 광기와 살육의 역사를 차례로 불러내고 이를 한판 굿으로 풀어내는 서사적 기록인 ‘손님’은 고통스러우나 화해와 통합으로 가는 벅찬 여정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흘린 회한의 눈물과 ‘손님’을 읽으면서 아린 가슴은 우리에게 내재된 아픈 역사를 깨닫고 이를 딛고 일어서라고 재촉한다.
어떤 유보도 없는 승리를 경험한 오늘, 행복한 리얼리즘 한 편을 갖게된 지금 나는 고통의 역사 ‘손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말이 되는’ 낙관적인 감동의 역사물을 지금 우리는 만들고 있다.
고희경 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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