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관해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기자에게 그녀는 뜬금없이 사과 이야기를 꺼내면서 “맛을 표현해 보라”는 어려운 주문(?)까지 했다.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그녀는 ‘맛 표현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여주듯 말을 이었다.
“홍옥은 새콤달콤하면서도 가벼운 맛이지요. 대신 부사는 풀바디(full body)의 꽉찬 모양에 달고 시고 깊은 복잡한 맛이 납니다. 포도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흔히 먹는 캠벨은 달콤하면서 신맛도 나지만, 고급스런 맛은 아니지요. 이에 비해 거봉은 산도가 낮지만 단맛이 더 깊고요.
와인은 원료인 포도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축구를 즐기려면 최소한, 골키퍼가 손으로 공을 잡아도 된다는 규칙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듯, 와인을 즐기려면 최소한 기본 네 품종(레드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화이트와인은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이 있다는 정도는 알아 놓으셔야 합니다.”
(확실히, 제대로 된 전문가들의 말은 쉽다.) 미국과 영국의 와인전문가 공인자격증이 있고 서울 역삼동에서 와인전문 유통업체인 세브도르 주류 백화점을 운영하는 김기재씨(35·사진)는 만남과 향유의 도구일 뿐인 와인을 ‘어려운 술’로 만드는 엄숙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이번에 낸 ‘와인을 알면 비즈니스가 즐겁다’(세종서적)는 쉬운 언어로 와인을 소개한 책이다. 와인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비즈니스에서 협상을 좀더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매개체로 보고 비즈니스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매너와 상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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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관련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녀를 굳이 ‘저자는 말한다’의 주인공으로 택한 이유는 사실 책보다 그녀의 삶에 대한 관심때문이었다.
그녀는 우리 귀에도 익숙한 ‘가자(KAJA) 주류백화점’의 창업멤버다. 대학원생때인 1989년, 아버지가 창업을 하자 맏딸인 그도 학업을 접고 사업에 뛰어 들었다. 가자주류백화점은 주류유통 프랜차이즈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면서, 95년 전국 154개 전문점을 둘 정도로 급성장했다. ‘와인’하면 돈많은 사람들이 마시는 프랑스 술 정도로나 알고 있었던 당시, 김씨네는 미국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칠레 등에서 1만∼2만원짜리 와인을 수입해 와인 대중화의 길을 열어 나갔었다. 그러다 97년 외환위기때 부도가 났다. 순식간에 모든 재산을 공매처분당했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쓰러졌고 ‘가자’라는 브랜드까지 압류당해 외국계 회사에 넘겨주게 됐다.
“부도를 수습하며 보낸 지난 3년간 겪은 심적 고통 때문에 정신 연령은 50대가 다 됐다”고 웃으며 농담을 하는 김씨에게서 위기를 겪고 이겨 나가는 사람 특유의 강단과 낙천성이 엿보였다. 적(부도)이 없어지자, 갑자기 공허감이 밀려 들었다고 한다.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때문. 2년6개월간 여동생 둘(모두 와인전문가 자격증을 가진 와인가족이다)과 함께 집필 과정을 거쳐 비즈니스맨을 겨냥한 와인책을 탄생시켰다. 원산지가 어떻고 작황연도가 어떻고 하는 복잡한 책이 아니라 비즈니스와 생활에서 와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와인을 통해 삶의 극과 극을 경험한 그녀는 와인을 삶에 비유하곤 한다.
“척박한 땅에서 단 것을 만드는 포도도 그렇고, 과정과 숙성의 술인 와인을 삶에 빗대면 무궁무진한 철학이 나옵니다. 삶의 고통을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숙성의 과정’으로 본다면, 인생은 즐거운 여정 그 자체지요.”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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