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보다 20분 남짓 지나 작가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70년대풍의 전원카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나온 새 소설집 ‘상속’이 축하를 받느라 ‘문학과지성사’의 금요 문인 모임에서 ‘조금’ 과음을 했다고 말했다. 창밖의 잔 자갈 위에 햇살이 하얗게 퍼져드는, 약간의 후덥지근함이 느껴지는 초여름 한낮이었다.》
-외국 체재는 처음이신가요.
“아니예요. 2년 전에도 3개월 동안 시애틀에 있었어요. 일상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고 싶다는, 비교적 단순한 생각이었죠. 그 일이 이번 초청의 계기가 되었어요.”
짧은 체류 중 그는 후배에게 첫 장편 ‘새의 선물’을 건네주었고, 후배는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은 워싱턴대의 한국인 교수 H씨에게 이 책을 보여주었다. 워싱턴대의 이번 초청은 ‘새의 선물’을 읽고 감명을 받은 H교수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
“특별한 과제는 없어요. 자유로운 마음으로 문화체험을 하라는 것이죠. 시애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마음에 들 뿐더러, 지난번 체류때는 ‘사회적 소수자’이자 ‘약자’가 되어본다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체험이 되었어요. 그쪽 관습과 언어에서 얼마간 낯설고 서툰 존재로 생활한다는 것이….”
홀로 떠난 2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온 가족이 함께 떠난다. 시사주간지 기자인 남편도 특파원으로 발령받는 ‘혜택’을 누리게 됐다. ‘비 더 레즈’ 티셔츠를 입고 한달 동안 뛰어다녔다는 덩치큰 고1, 고2 짜리 두 아들도 동행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의 해방이 안돼잖아요?”라고 쿡 건드려 보았다. 작가는 “아니에요! 나를 압박하는 현실은 ‘일’이지 가족은 아니거든요”라며 깔깔 웃었다. “그런데 시애틀에 있는 동안에도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을 연재한다는 약속을 해놓았으니…” 라며 흐리는 말 끝에 반 쯤은 장난스러운 한숨이 묻어났다.
그가 연재하기로 약속한 장편은 ‘너무 다른 형제들’에 대한 것. 한 사람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를, 또한 사람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인물로 그려낼 계획이다. 문득, 이번에 그가 시도할 소재 역시 ‘선택’과 ‘배제’의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 소설집 ‘상속’에서 그가 형상화한 인물상은 대부분 사회의, 부모의 사랑과 인정, 선택을 갈구하지만 그 방식의 서투름 때문에 소외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아예 ‘선택’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외면하고 웅크리는 (딸기도둑)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배제’의 이야기를 문학평론가 김동식은 책 말미의 해설에서 ‘열성(劣性) 유전자의 발생학, 또는 문화적 유전자로서의 진화론’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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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배제의 이야기로 들여다볼 수 있겠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얘기한다면, 제 소설에 나타난 ‘선택과 배제’는 경쟁을 이긴 소수와 경쟁에서 진 다수의 대립을 그리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배제되는 것 자체가 삶의 모습의 일부’라고 보는 거죠.”
기존의 가치관, 사상, 질서, 관습에 적응 못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다 찬성한다고 말하는 질서는 무엇일까, 우리가 말없이 받아들이는 ‘착함’과 ‘잘남’이 무조건 동감할 만한 것인가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새 소설을 시작할 때는 노트 한 권씩을 마련해요. 등장인물의 나이, 생김새, 성격, 기승전결, 단문을 주로 쓸까 긴 문장을 쓸까 등등을 계속 메모하죠. 당분간 중단편에 집중하려고 얼마전 얇은 노트를 다섯 권이나 샀는데, 일이 예상못한 쪽으로 또 풀려가네요.”
갑자기 그의 오른손이 공기를 휙 갈랐다. 기자는 이유도 모른 채 뺨을 얻어맞을까 놀라 주춤했다.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펴보이는 그의 손에 모기가 한 마리 포획돼 있었다. “손이 빨라서 날벌레를 잘 잡아요.” 의식하지 않은 행동에 그 또한 겸연쩍어 했다.
작가의 새 노트 다섯권 속에 포획될 숨겨진 삶의 진실들은 어떤 것일까. 손이 빠른 그는 시애틀에서 그 노트를 사용하게 될까, 아니면 돌아와 한참이나 지난 뒤의 일이 될까. 궁금증이 들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