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노년의 性]"어른신답지 못하게…" 야속한 시선 씁쓸

  • 입력 2002년 7월 2일 16시 38분


70대 노부부의 성생활을 사실적으로 다뤄 화제가 된영화 '죽어도 좋아'의 한 장면
70대 노부부의 성생활을 사실적으로 다뤄 화제가 된
영화 '죽어도 좋아'의 한 장면
어느 전립선 비대증 노인환자가 있었다. 소변을 보는 것이 시원찮아 결국 비뇨기과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갑자기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거의 손자뻘인 주치의는 왜 할아버지가 우울증에 빠졌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진을 부탁받은 신경정신과 의사는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그 이유를 금방 읽었다.

나이 어린 주치의에게 부끄러워서 감히 털어놓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걱정은 “중요한 부위에 칼을 대었으니 앞으로 성생활에 지장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단 30분간의 상담으로 걱정을 던 할아버지는 입원실을 나가는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밝게 웃었다.

‘노인의 성’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눈을 가리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노인의 성은 그 자리에 도도하게 서 있다. ‘젊은 사람들의 성’과 같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은은한 달빛과 같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회적 편견과 의학적 무지가 그 존재를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성은 단지 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몸만의 문제라고 생각해 ‘몸이 늙으면 성 기능도 늙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마구잡이 논리를 펴는 것이 문제다.

성 행동은 몸, 마음, 사회성이 어우러져 일어나는 현상이다. 몸은 비록 늙어 성 호르몬이 덜 나오고, 성적인 자극을 덜 받더라도 키스, 포옹, 애무, 삽입, 배설과 같은 성 행동을 통해 예전과 같이 상대방과 사회적 교감을 나누고 싶은 오래된 마음은 그대로인 것이다.

노인의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논하려면 아마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쉽게 생각나는 것들만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인들은 사람들을 연령층에 따른 소집단으로 나누고 젊은이는 젊은이와, 중년은 중년과, 노년은 노년과만 만나야 된다고 은근히, 때로는 명시적으로 강요한다. 그 결과 앞으로 쓸 날이 많지 않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많이 떠나 버린 노인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각자 판단력을 가진 어른과 어른 사이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차가 크면 사회는 이를 색안경을 쓰고 본다.

몇년 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 어린 제자와 결혼했을 때 오랫동안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관심을 가진 이들의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아마도 노인들은 부러웠을 것이며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전통이 곳곳에 배어 있는 한국인들은 절대로 부럽다, 샘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객관성을 가장해서 은근히 비판하고자 할 뿐이다.

이런 예는 매우 예외적이다. 체력이 있어야 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필요하며, 질시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배짱도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설령 경제적 능력이 있다고 해도 재혼을 하려고 하면 자식들의 저항이 드세다. 재산 문제가 필히 대두되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운 노인은 노인대로 추가적인 부양 책임을 우려하는 자식들의 목소리를 이겨내야 한다.

이럴 때 내세우는 자식들의 논리는 돈에 관해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으면서 꽤 합리적인 듯 보인다. 그리고 젊은 자식들의 토론 능력을 늙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겨내기는 매우 어렵다.

한국 사회가 정의하는 노인은 ‘점잖고, 검소하게 입으며, 아이 잘 봐주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필요할 때만 필요한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의 성 행동? ‘주책 없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다.

노인들은 사회가 정의한 역할을 벗어나면 위험에 처한다. “젊어 보이십니다” 하는 인사말 속에는 “집에서 아이나 보지 왜 쓸데없이 젊게 차리고 돌아다니느냐” 하는 비난이 숨어 있다. 특히 요사이와 같이 젊은이들의 사회적 발언이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세상에서는 ‘젊은 사회로 재진입’을 노리는 노인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왜 그러할까? 젊은이들의 무의식 속에 “나도 언젠가 저렇게 늙고 꼬부라지겠지” 하는 엄청난 두려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노인과는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이다.

노인의 건강은 유지관리를 필요로 하고 유지관리에는 돈이 든다. 아픈 노인에게 성 행동은 사치와 같다. 젊어서 벌어 놓은 것이 없으면 병원 다니기도 힘들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만나서 쓸 돈의 여유도 없다. ‘힘나게 하는 약’은 그저 남의 동네 이야기일 뿐이다.

노인의 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한다고 해서 다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존재한다고 해서 다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힘 없고, 돈 없고, 자식복 없는 노인들에게 ‘노인의 성’은 ‘그림의 떡’이다.

노인의 성을 다룬 영화가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은 흔히 망각되고 부정(否定)된다.

정도언 서울의대 교수·정신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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