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반성이고 성찰이다. 미술 작가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한다는 것은 더욱 처절한 반성이다. 그래서 자화상엔 작가들의 치열한 고뇌와 불같은 열정 등 작가의 은밀한 내면이 담겨 있다. 여기 그치지 않고 작가가 속한 한 시대의 풍경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미술의 자화상’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한국화가 강경구 김선두 사석원 조환 홍순주, 서양화가 강형구 서용선 이석주 최석운 한만영, 조각가 고명근 배진호 이종빈 정현 등중견 작가 25인의 그림과 조각 자화상이 선보인다.
우선 개인적 시대적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한 고뇌와 열정이 두드러진다. 조각가 배진호는 ‘가면’이라는 플라스틱 자소상(自塑像)을 통해 힘겨웠던 우리 세대의 얼굴을 보여준다. 표면을 갈라진 논바닥과 같은 질감으로 처리한 것이 극적으로 다가온다.
힘찬 묵선을 통해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해온 한국화가 강경구는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는 자신의 삶을 목판 자화상으로 보여준다. 안경 너머로 세상을 응시하는 눈빛이 강렬하다. 서양화가 강형구는 헝클어진 머리칼에 담배를 입에 꽉 문 표정으로 무언가 결연한 의지를 표현했다.
반면 극사실주의 화가 이석주의 자화상은 우수에 넘친다. 1972년 대학생 시절, 장발 머리에 붉은색 머플러로 한껏 멋을 낸 이석주의 얼굴은 미술학도로서의 낭만과 우수 그 자체다.
각박한 일상을 풍자해온 서양화가 최석운의 자화상은 색다르고 익살맞다. 정작 자신은 뒷모습만 보인 채, 안고 있는 아들의 얼굴로 자화상을 대신했다. 지금의 세상과 미술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녀에 대한 아련한 사랑과 희망도 숨어 있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한다.
서양화가 한만영의 자화상은 얼굴에 그치지 않는다. 나무 박스 안에 자신의 자화상을 배치하고 그림 뒤에 안경 신용카드영수증 물감 등의 일상용품을 집어 넣어 자신의 일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조각가 고명근은 적극적이고 범인류애적이다. 자신이 예수와 석가의 어깨에 팔을 얹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모습의 조각으로 자화상을 대변했다. 인류 문명간의 갈등을 화해하고 싶어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자화상의 매력은 역시 작가의 내면과 시대 풍경을 훔쳐볼 수 있다는 점. 그 매력은 조각가 정현의 작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거울에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뒤 그 틈새로 관람객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관객 모두에게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자화상 이외에도 자신의 작품을 2점씩 더 출품해 자화상과 비교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02-399-1773, 1776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