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에 듣는 음악]伊오토리노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 입력 2002년 7월 2일 18시 41분


《여름의 얼굴은 언제나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숨통을 막히게 하는 열기와 희뿌연 지평선, 어느틈에 소나기라도 한바탕 지나가고 난 뒤의 속시원한 해방감, 마음을 들뜨게 하는 휴가의 꿈…. 반기기도 피하기도 힘든 딱한 꼴이 되고 만다.

뱃속에 태양이라도 꿀꺽 삼킨 듯 온 몸이 달아오를 때는 어떻게 할까. 섣불리 에어컨이라도 세게 틀어댔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더위와의 싸움은 기(氣)싸움인 것이다. 차라리 음악을 틀어놓고서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여름의 혼란스러운 마력과 매력에 직접 맞서는 것이 나을 지 모른다.》

이탈리아의 근대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1879∼1936)라면 어떨까. 만화영화 ‘환타지아 2000’으로 친근해진 그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를 콘서트에서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장려한 음향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마지막 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이른 여름 아침, 시인은 로마시대의 옛 길 ‘아피아 가도’에서 환상을 본다. 먼 원정을 끝내고 개선하는 로마군 부대의 행진이다. 창끝이 방금 떠오른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고, 키큰 소나무는 더욱 짙푸른 색과 향내를 뿜어낸다. 언덕을 넘는 정예 군인들이 환성을 지른다. “로마다. 어머니 도시에 돌아왔다….” 이 빛나는 개선의 장면이 전 관현악의 합주로 웅장하게 표현되며 끝나는 작품이 ‘로마의 소나무’다. 장엄한 음향의 폭포수가 한나절 더위를 지레 날려버리고도 남는다.

아침의 개선장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의 3악장은 로마에 있는 지아니콜로 언덕의 소나무를 그리고 있다. 현의 환상적인 부유(浮游)가 달빛을 표현하고, 밤꾀꼬리가 노래를 부른다. 여름밤에 들으면 더없이 마음을 청량하게 만드는 악장이다.

레스피기의 자그마하지만 아기자기한 관현악 모음곡 ‘새’도 놓칠 수 없다. 전주곡에 이어 비둘기, 닭, 나이팅게일, 뻐꾸기가 세밀한 음화(音畵)로 표현된다. 주제는 수백년 전 바로크 시대 선배 작곡가들의 악보집에서 따서 썼는데, 오래된 선율에 관현악의 섬세한 옷을 입혀 환상적인 연출을 한 것이 무척 재미있다. ‘비둘기’의 가녀린 노래가 가슴을 저릿하게 하며, 전주곡의 의기양양하고 상쾌한 선율이 여름 아침을 밝은 빛으로 채워준다.

역시 레스피기의 작품으로 ‘옛 춤곡과 아리아’모음곡 3번도 널리 사랑을 받는 작품. ‘새’모음곡 처럼 고전-바로크시대 작곡가들의 주제를 편곡한 것인데 현악 합주만으로 연주돼 고색창연하고 전아한 느낌을 풍긴다. 타일과 흰 석회만으로 장식된 지중해변의 건물 안에서 꽃내음을 맡으며 잠시 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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