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봤어요?”
“지금은 사우나에 있다던데?”
“애기 아빠 보고 좀 찾아보라고 하지?”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줌마들은 소곤소곤 정보를 교환하며 대표팀의 동태를 살폈다. 엄마를 따라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이 오히려 피곤한 듯 “밥부터 먹어, 엄마∼”하며 보챘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히딩크는 엄마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6명의 경찰특공대를 밀치더니 빠짐없이 엄마들 옆에 서서 사진을 함께 찍었다. 오히려 경호원에게 아줌마들의 카메라를 주며 “You make the picture(우리 사진 좀 찍어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신 일부 아저씨들이 수줍은 듯 사진 찍자고 하면 여력이 없는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후 11시, 복도와 로비의 ‘경호원 벽’을 뚫고 이천수가 약속대로 기자가 잡아 놓은 객실로 건너왔다. ‘TV로 본 월드컵’에서 궁금했던 점을 위주로 물어봤다.
-경기에서 이기면 항상 선수들이 감독한테 뛰어들어가서 안기던데요.
“글쎄, 뛰다 보니까 다들 종착역이 거기였나?(웃음) 그때 심정은요, 이렇게 우릴 믿어줘서 우리가 이렇게 해냈다, 그래서 고맙다는 거였어요. 누가 먼저 제안한 적도 없고…. 감독님은 평소에도 잘하면 가슴에 한번씩 잘 품어주세요. 우리도 버릇이 됐나봐요.”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서는 뭐 했어요?
“잠이 잘 안 오거든요. 이기면 이기는대로 상기돼서 그렇고, 지면 열 받아서 그렇고…. 새벽 3, 4시까지 재방송보고 그랬어요. 저는 잘 보고 밀어준 건데 해설자가 ‘어이없는 패스를 하는군요, 이천수!’라고 말하면 ‘저건 정말 아니다’ 싶기도 했어요.”
-700만명이나 모여서 응원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감격이 북받치죠. 선수말고 전사(戰士)라고 하니까 정말 책임감 같은 것도 많이 느꼈어요. ‘무조건 운동장에서 쓰러지자’ 말고는 선수들끼리 나눈 대화가 별로 없었어요.”
-동료들이 페널티킥 실축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속으로야 그랬죠. ‘으유 왜 밀어, 후리라니까.’ 일단 후리면 골키퍼가 방향을 읽어도 들어가게 돼 있거든요. 그렇지만 실수는 누구나 하는거고, 실수한 형들의 마음은 누구보다 더 잘 알죠.”
-황선홍 선수나 김태영 선수가 다쳐서 피가 났을 때 뒤에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저도 한 번 찢어져 보고 싶었어요. 멋있잖아요(웃음). 평가전 땐 저도 몇 번 그런 적 있는데, 경기 중엔 별로 아프진 않을 거예요. 피가 나면 좀 뜨뜻해지는 기분이 들죠. 요상하게 흥분도 되고….”
-갈수록 많이 체력이 달렸겠어요.
“솔직히 독일과 경기할 때는 후반 20분부터 쥐가 나더라고요. 아닌 척 발을 세게 구르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겨우 모면했어요. 다른 선수들도 그랬을 수 있지만, 경기 끝나면 창피하니까 서로 그런 얘기는 잘 안해요.”
-히딩크 감독님이 선수들한테 잘 해 줬죠?
“운동장에선 영어로 욕을 달고 다녀요, 잘 좀 하라고. 그렇지만 운동만 끝나면 180도 돌변하죠. 언제나 ‘잘 했으니 편히 쉬자’는 게 첫말이에요. 그리고 매일 하나씩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줘요. 아무래도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썰렁한 것 같다가도 생각해 보면 웃긴 게 많아요. 저보고 ‘릴리’라고 불러서 ‘백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래요. 프랑스 ‘릴’지방의 프로구단으로 가고 싶어하는 ‘리(천수)’라서 제가 ‘릴리’래요.”
-하프타임에는 별 말 안했어요?
“목사님처럼 설교하세요. 전술 이야기는 거의 안 하더라고요. 지금부터 시작이다. 최선을 다하면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질거다….”
-영어로 하면 잘 못 알아듣지 않아요?
“통역이 있으니까…, 만날 하는 말은 이제 대충 뭔지 알아들어요. 제일 알아듣기 쉬운 건 때 되면 꼭 하는 ‘런치타임’….”
-이탈리아와 할 때는 심판판정에 홍명보선수가 항의하는 장면이 더러 나오던데….
“감독님이 그랬어요. 여기는 홈이니까 어필할 것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강력하게 어필하라고. 이탈리아하고 할 때는 특히 ‘걔들이 워낙 얍삽하니까 반칙하면 일일이 대응해라’고까지 얘기해 주셨어요. 어쨌든 우리는 판정 때문에 손해본 건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득봤다고도 생각 안 해요.”
-포르투갈과의 경기 때는 정말 피구가 무승부하자고 그랬대요?
“우리끼리 웃으면서 영표형이 오버한 거라고 그래요. 뭐, 여차저차하면서 말이 와전된 것 같아요.”
-경기 끝나고 이영표, 최태욱 선수와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던데.
“전 태욱이에 비하면 나쁜놈이에요. 솔직히 전 매일 골 넣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근데 태욱이는 옆에서 ‘처음에는 게임에 못 뛰어서 서운했지만 하나님이 큰 뜻으로 저를 보살펴주시는 것을 압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했죠.”
-선수들이 감독님께 따로 인생상담도 했습니까?
“감독님은 개인 면담 절대 안해요.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많아질수록 팀 안에서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거든요.”
-여자친구는 다들 있나요?
“두리형, 영표형, 종국이형…. 저 빼고는 다 있던데(웃음). 안 그래도 월드컵 끝나고 소개팅 한두 건 하려고 해요. 친구가 세종대 무용과 학생 소개해 준다고 해서 기대 중이에요. 키 큰 여자가 좋아요, 전. 그냥 예전부터 그랬어요.”
-‘테크노마린’ 시계를 차고 있군요. 패션에도 관심이 많은가 봐요.
“프라다 좋아해요. 티셔츠나 바지가 적당히 몸에 붙는 옷이 많아 마음에 들어요. 체격이 그래서 그런지 헐렁한 옷 입으면 좀 없어보이는 점이 있어요.”
-선수들끼리 자주 만나서 놀아요?
“사실 우리끼리 밖에서는 거의 안 만나요. 다 자기 편한 친구들하고 놀죠.”
-축하 e메일 많이 오겠어요. KTF광고보니까 격려메시지도 많이 받았겠던데.
“호텔 비즈니스센터 컴퓨터로 가끔 확인하는데, 하루 1000통씩 와서 지워도 지워도 용량초과였어요. KTF광고에 전화번호 나온 건 저도 봤는데 저한테는 전달 안 되던데요.”
-월드컵이 끝나게 되니까 뭐가 제일 좋아요?
“병역 면제 혜택에 대한 보답으로 거들먹거리지 않고 꼭 유럽 진출해서 국위선양할 겁니다. 이번에 한국 축구선수의 책임감이 뭔지 정말 많이 느꼈거든요.”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8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히딩크의 지시로 선수들은 예전과 달리 독방을 쓴다고 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울면서 경호원과 실랑이하고 있는 여고생과 마주쳤다. 이천수 선수는 “울지마!”라고 짧게 외치며 사인해 주었다. 음대 지망생인 듯 보이는 여고생은 자신의 악보에도 사인을 받았고 이천수는 친구들 주라며 몇 장을 더 해 줬다. 선수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책임감’은 여러 곳에서 확인됐다.
이틀 뒤인 지난달 30일. 인천 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이천수는 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전화가 3초 간격으로 울린다고 했다.
-터키와의 경기가 아쉬웠을 텐데….
“다들 의욕이 넘쳤는데…. 감독님도 잘했대요. 감독님은 이탈리아와의 경기 전 날 딱 한 번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세게 화를 내셨지요.”
-터키한테 지던 날 밤은 뭐 했어요?
“감독님이랑 호텔 지하 바에서 ‘짠’했죠. 감독님이랑 외국 코치들이 하도 와인을 좋아해서 그런 자리에서는 와인밖에 안 먹어요. 감독님에겐 카리스마 같은 게 있어서 아무도 ‘남아계실 거예요, 떠나실 거예요?’ 말도 못 꺼냈어요.”
-다른 선수들은 뭐 한대요?
“일단 여친(여자친구)들 만난다고 하던데, 집에는 연락만 해놓고 나중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경주〓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