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 읽으세요?”
그는 다행히 공손한 사람이었다. 책 표지를 슬쩍 올려서 보여 주었다.
‘끝없는 용기와 도전’ 이라는 잭 웰치 자서전이었다. 나는 그 책을 지난 해 4월 뉴욕에 갔다가 링컨센터 앞 반스앤노블 서점에서 샀다. 그가 읽던 책은 물론 번역판이었다.
“재미 있어요?”
책에 머리를 다시 박은 그는 어느 문장 하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상한 사람 다보겠네’ 대답하기 싫었는지 대답이 없다. 그러다 고개를 세우고 “너무, 너무 재미 있어요” 했다.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했다.
“혹시 ‘모리’도 읽었어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요. 읽었어요.”
그는 다시 책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책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니 대화를 멈추기 아까웠다. 그래서 또 물었다.
“원서(原書)로 읽었어요?”
그는 정말 재미없는 상대였다. 책에 머리를 박은 채 그냥 한번 머리를 흔들고 끝이었다.
“웬 원서?” 하든지 “왜 자꾸 말 시키느냐?” 든지 쯤은 대꾸해도 되지 않는가. 나는 그만 긴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다.
“잭이 재미 있으면 나중에 Jack 원서를 사서 다시 읽어 보면 좋을텐데요.”
그제서야 그가 머리를 들었다.
“원서-어-를요?. 에이, 자신 없어요.”
“죄송하지만, 어디 다니세요?”
“금융기관이요.”
“토익 토플은 보았을 것 아니에요.”
“그거야, 직장에서 시험을 보니까 살아 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했지요.”
“영어 단어 900자면 원서 거의 다 읽을 수 있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중학교 3학년 정도군요.”
“어느 나라 책이나 베스트셀러는 단어가 많지 않고 문장구조도 평이해요. 그래야 다들 손 쉽게 사고 읽으니까 베스트셀러가 되지요. ‘모리’가 그렇고 시드니 셸던이 그렇고, ‘스몰 이즈 뷰티플’, ‘제3의 파도’도 그렇고, 마셜 맥루헌, 피터 드러커가 다 그래요. 그러니 겁내지 말고 한 번 사서 읽어 보세요. 원서라고 비싸지도 않아요.”
“에이, 자신없어요.”
나는 속으로 ‘이봐, 젊은 친구, 무슨 자신이 그렇게 없어!’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한 권 사서 석달 걸리든 넉달 걸리든 ‘원서라는 것’ 한 권 읽어 보겠다, 떼고 말겠다!해보세요.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두 번 째는 쉽고 세 번째는 아주 쉬워요. 사랑도 직장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래도 자신없어요.”
“시간도 없지요?”
“예!.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하도 ‘영어 !영어!’해서 지겹기도 하고요!”
“책을 소리내어 읽어 보세요. 눈으로 보지 말고 속으로라도. 영어 공부 효과도 훨씬 커요. 나도 지금 하루 30분은 영어책 소리내어 읽어요. 알아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가 내려야 할 역이 되었다. 인사라도 하려는지 일어서서 쭈삣거리는 그에게 내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잭도 그러잖아요? 변화, 변신에의 도전이 경영이다! 인생이다! 한 번 해 봐요. 겨우 책 한 권 트라이해 보는 것 뿐. 손해 날 것도 없으니까.”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빙긋하고는 “한 번요?” 하고 물었다. 나는 “다섯 번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책이든 잡지든 원서를 너무 안 읽는다. 책을 사도 그저 번역본을 산다. 번역자나 번역 출판사에 미안한 말이지만. 일본만 해도 소위 양서(洋書) 취급 서점이 300곳인데 우리는 겨우 10곳이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만난 친구처럼 원서 하나 도전해보는 것에도 너무 자신 없어한다. 맞다. 정치를 제대로 하나, 경제가 확 피나. 달라졌다!는 것이 고작 이 놈의 게이트-게이트-또 게이트,라니! 지하철에서 만난 친구가 이랬으면 어쩔뻔 했나.
“아버지들이 IMF다 뭐다 다 끌어들이고, 무슨 훈계입니까!”
그러나 내가 사회는 못 바꿀지라도 나 하나는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 답답함에 짓눌려있던 터에 4월이 가고 5월이 왔다. 그리고 저 ‘와아! 우리가 또 이겼다!’의 6월이 지났다.
앞으로 나의 지하철 친구의 이야기는 이런 반전도 가능하지 않을까. “자신 없어요”하던 친구가 “그래,한번 해보자구요!”라고 바뀌는 반전 말이다.
박의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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