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도는 모두 운이 다하고 서학은 아직 따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판단했던 최제우로서는 전통사상과 서학으로부터도 상당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사상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자유로움은 동학의 탄생이 ‘한울님’의 계시라는 평지돌출적 형식으로 표현되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그럼에도 동학에는 최제우 자신의 학문과 사상적 바탕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도 많이 반영돼 있다. 그가 계시를 받기 전 30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아 왔고, 계시를 받은 후 동학을 설파하며 당대의 많은 사람들과 생각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최제우가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는 데 가장 직접적인 자극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서양의 위협과 자신의 집안을 포함한 조선의 몰락이었다. “서양사람들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상황이었고, 이에 최제우는 “백성을 편안히 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울님’으로부터 들었다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가르침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 아이와 노인과 여성, 그리고 하층민들을 모두 동등한 한울님으로 대접하는 혁신적 사상이었다. 이는 국내적으로 사회적 강자의 부당한 수탈에 저항하는 사상이 되고, 대외적으로는 남녀노소와 신분으로 갈기갈기 분열돼 있던 조선인 모두의 힘을 합해 외세와 맞설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최제우의 동학 안에는 심신 수양과 성현의 말씀에 대한 학습을 통해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상징되는 유교적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제우가 수행의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수심정기(守心正氣·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함)는 만인이 함께 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 목표는 기존에 ‘성현’들이 가르쳤던 가치관에 기초해 구성원들의 기능적 역할분담이 ‘조화롭게’ 이뤄지는 구질서의 회복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사상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는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 최시형의 북접(北接)이 이를 종교적으로 구현하는 데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이를 해방과 변혁의 무기로 삼은 것이었다.
이 시대에도 동학에 어떤 의미와 역할을 기대한다면 이는 동학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자의 몫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