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계의 양대 챔피언인 AOL타임워너와 비방디유니버설의 주가가 미국 증시에서 터져나온 분식 회계설에 휩싸여 급락하는가하면 광고 판매도 부진해 현금흐름을 옥죄고 있다. 화약은 미국에서만 터진 게 아니다. 영국의 디지털위성방송업체 ITV디지털이 쓰러졌고 스페인의 키에로TV도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헐리우드와 록펠러센터 추락
세계 미디어 복합그룹의 패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선 오랫동안 굳어져왔던 업계의 권력이 교체되고 독과점적인 시장구조가 완전경쟁형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할리우드와 록펠러센터의 추락이다. 할리우드는 미국 방송·영상산업의 메카로 군림해오면서 유니버설, 워너브라더스, 폭스, 파라마운트 등 메이저 사들을 품고 있었으나 지금은 클러스터(산업집적지)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미국의 영상물 생산이 해외로 이탈하는 현상(Runaway Film Production)이 그 증거다. 미국 상무성 보고서에 따르면 TV에서 방송되는 주중 드라마의 미국 내 생산이 지난 6년간(1995∼2001) 약 33% 감소한 반면 해외 로케이션에서의 생산은 55%나 증가하였다. ’할리우드 액션’으로 상징되는 미국식 영상물에 어지간히 식상한 시장이 새로운 변화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밖에 성급한 디지털방송 전환정책도 할리우드를 압박하고 있다. 2003년 말까지 모든 상업방송을 디지털로 전환하도록 유도한 정책이 현실적인 자금부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록펠러센터의 추락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는 미국의 언론(보도), 출판, 문화산업이 휘청거리고 있음을 뜻한다. 뉴욕 맨해튼의 중앙에 위치한 록펠러센터에는 미국 TV산업의 리더인 NBC가 자리하고 있고 인근 타임스퀘어까지 AOL타임워너 로이터통신 등이 거대한 미디어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아성에서마저 최근 불거진 실적부진, 불투명회계, 시장가치하락 등의 악재로 말미암아 ‘권력’이 누수되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뉴욕을 강타한 9.11 테러사건의 여파로 미국의 독점적 미디어 경영과 활동에 대한 세계시민의 비판이 증폭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할리우드와 록펠러센터의 퇴조는 비관련다각화(무리한 확장), 도덕적 해이, 지나친 상업주의, 비전의 부재 등 기업내부의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GE, 머크 등 미국 굴지의 기업들도 함께 곤란을 겪게 만드는 전체 시장의 침체가 직격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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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즘(Chasm:균열·단절)이 최대 원인
이들 안팎의 여러 원인들은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가 있다. 이는 바로 캐즘이다.
하나의 기업이나 업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함정을 만나 지체하거나 퇴조하기도 하는데 그 함정이 바로 캐즘이다. 기업의 역사를 보면 탁월한 전략으로 캐즘을 넘어선 사례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인공지능이나 PDA, IMT-2000과 같이 캐즘을 겪고 있는 경우도 꽤 있다. 지금 세계 미디어기업들이 겪고 있는 고충도 전형적인 캐즘이다. 우선 AOL타임워너를 보면 인터넷포털 등 뉴 비즈니스의 성공담을 방송 등 전통사업에 지나치게 강요한 점이 문제였다. 계열인 CNN은 실제 소비자가 원하는 코드인 ‘콘텐츠의 전문성’에 무신경해 결국 경제, 경영뉴스에서 1위인 CNBC에 크게 밀리고 말았다. 또 AOL의 개인기를 중시하는 ‘스톡옵션’ 문화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타임워너의 고전적인 조직분위기가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도 말썽이었다.
비방디유니버설은 미디어에 환상을 품었었다. 150년동안 유럽의 수자원을 관리해온 비방디는 비관련분야인 위성방송, 게임, 영화사업에 너무 급하게 뛰어든 감이 없지 않다. 유니버설을 인수함으로써 전세계 미디어권력을 단 번에 쥐겠다는 과감성이 역효과(캐즘)를 불러왔다. 월트 디즈니도 혁신을 미뤄 캐즘에 빠진 대표적인 케이스다. 벤처 회사였던 픽사의 ‘토이스토리’가 크게 성공한 1995년 이후 3D 애니메이션에 모두 열광했는데도 디즈니는 뒤늦게, 그것도 픽사와 제휴하는 형태로 신기술의 막차에 간신히 오르며 허둥댔다.
유럽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디지털방송도 캐즘에 잠겨버렸다. 데이터방송, 고화질TV 등에 대한 수요가 실제로는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무시한 과당경쟁과 정부의 급한 정책추진이 화근이었다.
◇미디어 권력 다원화의 촉진
이런 와중에 어느새 신진세력이 등장하고 있어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소니가 신참들이다. 미디어 아웃사이더였던 이들 업체들은 주로 엔터테인먼트서버나 미디어 딜리버리 관련 기술력으로 무장해 기술의존도가 높은 미래 미디어시장의 다크호스로서 급부상하고 있다.
일례로 X-Box(마이크로소프트)와 Vaio(소니)는 홈엔터테인먼트 시장으로 불리는 차세대 주력시장의 강력한 표준 서버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또 영리하게도 실수요가 확실한 게임콘텐츠, 노트북등과 연계한 미디어 기술의 적용으로 불경기와 캐즘을 잘 넘어서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우리에게 친숙했던 AOL타임워너이나 비방디, 디즈니가 약화되고 새로운 업체와 브랜드가 부각되는 ‘물갈이’가 급진전되리라 여겨진다. 새 물결에는 한국의 미디어 기업도 능히 끼일 수 있다. ‘3류 변방’에서 ‘세계 16강’ 정도로는 너끈히 점프할 수 있는 호기를 잡았다. 남은 과제는 신문, 방송, 잡지 등 내수 위주의 시장을 열고 키워 일단 대형시장을 조성하고 동시에 기업공개, 경영시스템혁신을 통해 한국 미디어계의 기초체력을 강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다.
심상민 삼성경제연구소 소프트산업팀 수석연구원 ssmin@s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