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로베르토 쥬코’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시각을 뒤집어 본 문제작이다. 이유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쥬코에게 이 사회가 어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이 연극은 아버지를 죽인 죄수 쥬코가 감옥을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옷을 바꿔 입으려 집에 간 그는 “24년간 순하디 순했던 내 아들이 이렇게(살인마로) 변했단 말이냐”며 절규하는 엄마를 슬프게 바라보다 따뜻하게 포옹한다. 그리고 마치 안락사시키듯 목을 조른다.
쥬코는 이어 열다섯 된 소녀의 순결을 뺏고 형사를 죽인다. 이 상황만 본다면 쥬코는 ‘정신병자’거나 ‘패륜아’다. 하지만 그가 사는 세상 역시 불행하다. 소녀의 아버지는 만취한 채 상습적으로 엄마를 구타하고, 귀부인은 포르쉐를 몰며 풍족한 삶을 살면서도 고독에 몸부림친다.
쥬코는 강제로 범한 순결한 소녀와 서로 동화되고, 외로운 귀부인의 말동무가 돼준다. 그는 살인마면서 상대방에게 위안을 주는 극과 극의 존재로 묘사된다.
연극은 다시 감옥에 갖힌 쥬코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막을 내린다. 아버지를 왜 죽여야만 했는지, 왜 연쇄 살인범이 됐는지를 이 작품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쥬코는 온갖 억압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쥬코 역의 양영조는 무표정하면서 슬픈 눈빛 연기가 돋보이고, 귀부인 역의 김화영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한 심리를 시니컬한 목소리로 그려냈다. 이봉규 최정우 노진우 등 중견 배우들의 걸출한 연기력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패닉’상태에 빠진 세상을 회색빛으로 묘사한 무대와 몽환적인 전자 사운드를 선보인 ‘삐삐롱스타킹’ 출신의 가수 권병준의 음악은 극적인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로베르토 쥬코’는 마흔한살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1988년작이다. 이 작품을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연출가 기국서씨는 “살인범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시성(순수)에 대한 갈구가 작품의 메시지”라며 “쥬코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했다.
8월4일까지. 평일 오후 7시반, 금토 오후 4시반 7시반, 일 공휴일 오후 3시 6시(월 공연 쉼). 1만2000∼2만원. 02-566-7137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귀부인역 중견배우 김화영씨
‘로베르토 쥬코’는 영화배우 배두나가 50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자했다. 그리고 그의 엄마이자 중견 배우인 김화영씨(51)가 귀부인 역을 맡아 7년만에 연극계로 돌아온 작품이기도 하다.
“두나의 연기 공부 차원에서 소녀 역을 맡기려 했는데 영화 촬영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뤘어요. 배우로 과분한 대우를 받는 만큼 연극 발전을 위해 돈을 대라고 했죠.”
그는 “권태로운 삶을 살던 귀부인은 아들이 살인범에게 죽고 홀로 남게 되는 고독한 인간의 전형”이라며 “흉악한 사람의 내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반 출신으로 1984년 ‘유리 동물원’으로 데뷔해 ‘딸의 침묵’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백몽’ 등에 출연했다. 극단 ‘세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연출가 임영웅 채윤일 등과 돈독한 친분도 쌓았다. 그러나 1995년 ‘미친 사람들’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예나 지금이나 3남매의 엄마 역할이 더 중요해요. 배우는 항상 무대에서 구르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죠. 나이를 공짜로 먹는게 아니더라구요. 다시 연기를 하려니 어깨가 무겁네요.”
그는 젊은 연극인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매년 한두편 연극에 출연할 계획이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