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영문학자는 방송매체 등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아빠! 사랑해요”란 말을 도무지 납득 못한다. 말이 세월 따라 그 함의가 바뀌긴 해도 아마 사랑처럼 시도 때도 없이 그리고 날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된 낱말도 없을 것이다.
구세대들은 대체로 사랑이란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타령에 나오는 남녀간 연정을 지칭한다고 알고 있었지 싶다. 그것도 남의 말처럼 주고받았을 뿐, 당사자들에겐 남녀는 부부를 말함이고 그 관계가 부부유별(夫婦有別), 곧 부부는 공경의 예절로 맺어진 사이라고 교육되었었다. 그만큼 남녀 사랑은 은밀할 수밖에 없었다.
사적 공간에서 그렇게 잠행했던 사랑 타령이 이제는 특히 방송매체를 타고 남편 또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다. 방송매체를 통해 동네방네 알려야만 사랑이 증폭된다고 믿어서인지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랑 표현은 스스럼이 없다.
따지고 보면 인류가 지상에 등장하자마자 사랑이 사회적 실체임을 깨달았다.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이 숙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사회적 정당성을 강조해온 것은 무엇보다 종교의 몫이었다. 불교가 자비를 역설하고, 유학은 인(仁)을 강조하고, 기독교는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
사랑이 세속공간의 공식화두로 등장한 계기는 18세기말 프랑스혁명이다. 민주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프랑스 혁명이 내건 주의 주장은 자유, 평등, 박애였다. 자유는 사람의 개별 능력을 중시하는 개인적 가치인데 반해, 평등은 개인 또는 계층 간의 차이를 완화하는 데 역점을 두는 사회적 가치다. 두 가치는 상충하기 마련인지라 이 모순을 경감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박애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돕자는 이상의 실현인 것이다.
박애가 사랑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개인차원의 사랑이 그 토대임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말을 우리 사회에 전파시킨 중요 단초였던 기독교가 “하느님은 몸과 마음이 가난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되풀이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랑이 개인과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결정적 인자임을 다시 확인한 것은 변화무쌍했던 20세기 현대사였다. 세계적 권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막을 내리고 있던 20세기를 회고하기를 “한마디로 격변의 세월이었다. 모든 것이 변했던 격동 100년에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은 인간 삶에서 차지하는 사랑의 중요함이었다. 다가올 미래도 또한 그러할 것”이라 결론짓고 있다.
그렇게 금강석 가치를 지닌 사랑에는 사랑타령 유행가 수준이 아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지고지순함이 있다는 말이겠는데 도대체 그런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어려운 질문의 명쾌한 해답을 김수환 추기경의 명상집(‘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1999)에서 읽는다. 그의 시대적 위상은 한 특정종교의 수장에 그치지 않는다. 20세기는 공산주의 등장과 그 종말을 목격한 세월이기도 했는데, 철의 장막을 녹인 주인공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고 세계가 공감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민주대장정을 이끈 참 원로가 추기경이었던 점에서 그의 명상은 한 종교집단의 주목을 뛰어넘는 설득력과 무게가 있다.
그의 사랑론은 이렇다. 사람이 부귀공명 얻기에만 골몰한다고 알지만, 실은 부귀공명도 건강이 없으면 무의미한 까닭에 건강이 오히려 더 값짐은 자명하다. 건강은 곧 목숨을 말함인데 순국선열에서 보듯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그 목숨조차도 바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정 구하는 바는 결코 현세적, 한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것에 대한 갈구라 할 수 있다.
생명체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영생을 갈망한다는 것은 모순중의 모순이다. 그래서 사람은 한(恨)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소설가 박경리의 지론이다. 추기경의 명상은 영원에 대한 갈구가 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은 자연스럽고, 그 사랑은 절대자가 한결같이 사랑하는 속세 사람들과 나눠야만 참뜻이 이뤄진다고 타이른다.
“미국 사람은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 영국식자들의 견해. 앞서 말한 영문학자의 전언이다. 미국 사회를 홍수처럼 뒤덮는 말이 러브인데도 피상에 그친 채 사랑의 진정한 속뜻을 간과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부부사랑을 필두로 가족사랑에 그치는 우리의 협량(狹量)을 경계하는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김형국 서울대 교수 kimh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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