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제일 통절하게 느낀 것은 내가 참 오래 살았다는 감회였다. 내 나이 만 54세가 되었으니 베토벤만큼 이미 살았고 재력을 쓰고도 남을 나이다.… 그때 문득 나는 김수근씨를 생각했다. 그 무렵 그는 죽음과 최후의 격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회고다. 건축가 김수근의 삶과 그 업적은 세계적 명성을 쌓아가던 백남준에게도 비춰 볼 만한 거울이었다.
김수근은 잠실올림픽 주경기장, 청주박물관, 남산자유센터 등 현대 한국의 대표적 건축물을 설계하고 ‘공간’ 그룹을 이끌며 1960∼70년대 한국 문화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건축가, 예술인이기 이전에 호탕한 한 인간이었던 그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어왔고 이는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됐다. 그가 한국건축문화예술의 개척기에 르네상스적 재능을 발휘하고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의 각계 문화 예술 정치 기업인들과의 호흡과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94명에 달하는 필자들의 면면도 이런 그의 삶을 보여준다. 이어령(문학평론가) 김덕수(사물놀이 연주가) 최정호(울산대 석좌교수) 승효상(건축가) 황병기(가야금 연주가) 유홍준(명지대 교수) 이건용씨(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김수근의 여러 모습을 들여다보며 한국의 근현대 건축과 문화예술이 걸어온 길의 이면을 함께 살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