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신작 ´잠의 열매…´ 펴낸 난해 소설가 박상륭씨

  • 입력 2002년 8월 5일 18시 34분


2일 젊은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 한 작가 박상륭(왼쪽 끝)은 '동년배 문인과는 대화가 잘 안된다. 젊은 작가들이 내 세대감각에 맞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2일 젊은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 한 작가 박상륭(왼쪽 끝)은 '동년배 문인과는 대화가 잘 안된다. 젊은 작가들이 내 세대감각에 맞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박상륭 선생님의 창작집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의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조촐한 자리를 갖습니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보낸 e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그렇다면…’이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몇 년 동안 품고 있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69년 고국을 등지고 캐나다로 훌쩍 떠난 작가가 있었다. 98년, 그는 29년간의 이국생활을 마치고, 서울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오래 전부터 이런저런 문학계 관계자들에게 들었던 사연에 요즘 근황이 덧붙여 들려왔다. ‘놀랍게도, 30대 젊은 작가들이 그 주변에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그의 아파트는 청년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컬트(숭배)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2일 저녁, 출판사 인근의 한 한식집에서 ‘컬트’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른 시간부터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인 차창룡 소설가 신상미 부부, 소설가 한강 정영문 김경욱, 평론가 서영채 손정수 등 다양한 ‘성향’의 젊은 문인들이 자리를 메웠다. 일곱시가 조금 지나자 주인공인 작가 박상륭(62)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보다 다소 마른 듯 한 모습의 노작가는 젊은 문인들이 방에 들어설 때 마다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며 경어체로 안부를 물었다. 여성문인 두 명이 그에게 꽃다발을 선사했을 뿐 따로 정해진 ‘식순’은 없이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이어졌다.

지난해 발간된 문학과 지성사의 ‘박상륭 깊이 읽기’를 통해 기자는 작가에 대한 약간의 겉핥기식 ‘예습’을 했다. 그와 서라벌 예대 동기이자, 가장 절친한 작가인 이문구는 ‘박상륭, 그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외국땅으로 떠나가기 전 그의 모습을 짐작케 해주었다.

박상륭은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 위해서’라는 엉뚱한 이유로 당시 사세가 최악이던 ‘사상계’의 문학 담당기자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만난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기자들은 처음엔 그를 ‘왕따’시켰으나 전혀 흔들림이 없는 태도에 끝내 항복했을 정도로 작가의 ‘깡다구’는 완강했다. 아내를 따라 느닷없이 캐나다로 기술이민을 떠난 뒤에도 그는 혼자만의 ‘모국어의 섬’에 서 창작에 열중했고, 경이적인 원고를 잇따라 보내왔다. 그 와중에도 일시 귀국, 지난날 ‘한국 최고 작가’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던 작가 박태순을 찾아 드잡이를 벌이는 등 별종이자 ‘주선(酒仙)’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9년의 외국체류 기간 동안 그는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등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빛나는 노작들을 선보였고, 지구 반대편 고국의 문단에 벼락같은 충격을 주었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때도 그는 별 말이 없었다. “떠날 때는 캐나다에 동양 고전 문헌이 훨씬 많았죠(그는 캐나다에서 서점을 경영했다). 오늘날은 우리말로도 번역이 거의 되어 있죠. 머물 이유가 없었어요” 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게 ‘젊은 문인들이 항상 주변에 진을 치는 이유’를 물었다. 노작가는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흘렸다.

“이 젊은 분들이 덕이 많아서죠. 대학 강의 한 번, 문예지 신인 추천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이렇게 많이 와주셨으니 감사하지요.”

그의 소설은 흔히 ‘난해소설’이라고 평가된다.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문에 대한 현답,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결했다.

“독자가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하는 겁니다. 책을 읽는 데 대한 준비운동은 역시 책을 읽는 겁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흔히 독룡(毒龍)과 그에게 바쳐진 공주, 공주를 구하기 위해 나타날 왕자의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이번 창작집에 실린 ‘영합(迎合)이냐 순제(殉祭)’냐에서 ‘독룡’의 이름은 바로 이 시절의 ‘대중문화’로 못박혀 설명된다. 문학을 구원해야 할 왕자, 또는 독자들이 용의 독에 눈이 멀어 그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는 걸까.

후배들의 성대한 배웅을 뒤로 하고 작가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20여명의 젊은 문인들은 밤 늦도록 작가에 대한 얘기꽃을 피웠다.

평론가 서영채에게 ‘왜 20여년 동안이나 고국을 떠났던 작가가 돌아오자 마자 컬트로 자리잡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기자의 언급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작가의 귀국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기 전부터 그는 많은 후배 문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종교와 사상, 문학을 넘나드는 그 분의 깊이와 넓이에 압도된 젊은 작가들 사이에는 ‘문단의 큰 스승으로 모셔야 될 작가’라는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문학사에서 빛나는 이유는 다양한 상징과 비유가 풍성한 주해와 분석, 재구성과 패러디의 대상이 되면서 훗날의 문학사를 풍성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도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작가를 이날 만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국 난해소설 계보 ‘날개’의 李箱이 원조… 장용학→ 최수철→ 정영문으로 이어져▼

한국 현대 문학사에 있어 평범한 독자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이른바 ‘난해소설’의 계보는 이상(본명 김해경·1910∼193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상은 ‘날개’ ‘지주회시’ 등의 대표작을 통해 한국 최초의 심리주의 경향 소설을 선보였다.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는 당대의 표준적 소설 작법에서 벗어나 지식인의 눈에 비친 모순적인 현실을 그려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왜곡된 상황과 지식인의 자의식 분열을 작품에 담아낸 그의 작품은 ‘난해성’을 이유로 당시 독자와 평단의 냉대를 받았다.

해방 이후 초기 문단에서는 장용학(1921∼1999)이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그는 ‘요한 시집’등 대표작에서 우화나 전설의 세계를 작품 속에 다루면서 인간의 본질 문제를 깊이 탐구했다. 일인칭 화자 ‘나’의 독백 형식을 즐겨 사용하고 다양한 상황이 엇갈리거나 모호하게 진행되는 의식의 내면공간을 그려내 ‘한국 관념소설의 대부’로 평가받았다.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현실세계와의 연관을 중시하는 참여문학론이 대세를 이루던 1970년대를 거치며 난해소설 계열의 작가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80년대 이후 서울대 불문과 출신인 이인성과 최수철 두 작가는 ‘난해소설’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작가로 인정받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인성은 연작소설 ‘한없이 낮은 숨결’, 장편소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등을 통해 인간 ‘욕망’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다양한 형식의 실험과 낯선 방식의 문체를 선보였다. 최수철은 장편 ‘고래 뱃속에서’, 창작집 ‘화두, 기록, 화석’ 등을 선보이며 끊임없이 기존의 형식과 문체를 파괴하는 미학적 실험을 추구하는 한편 현대인의 자의식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최근의 젊은 작가 중에서 ‘난해소설’의 계열에 속한다고 평가되는 대표적 작가로는 정영문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45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 ‘검은 이야기 사슬’을 발표해 주목받은 그는 ‘건조하게 그려내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고독과 허무, 그 불안한 심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손정수는 “난해한 소설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라도 고도의 심리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거나 동서고금의 우화와 신화를 끌어들이는 등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어 일관된 계보로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우리 문학의 개념과 지평을 넓혀주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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