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57돌 특집]한일 대학생이 만났다

  • 입력 2002년 8월 11일 19시 20분


일본측 고바야시 다쿠야 위원장(왼쪽)과 한국측 송승희 위원장이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하치오지=이영이특파원
일본측 고바야시 다쿠야 위원장(왼쪽)과 한국측 송승희 위원장이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하치오지=이영이특파원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은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양국민간의 심리적 거리를 얼마나 좁혔을까. 8·15 57주년을 앞두고 한일학생회의의 송승희(宋承姬·이화여대 심리학과 2학년) 한국측 회장과 고바야시 다쿠야(小林拓矢·도쿄대 교양학부 2학년)일본측 회장의 대담을 통해 알아보았다. 도쿄(東京) 하치오지(八王子) 대학세미나하우스에서 진행중인 연례 한일학생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두 사람은 8일 회의 중 잠시 짬을 냈다. 두 사람은 “학생회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적인 의견”이라면서 자유롭고 진취적인 한일관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월드컵기간중엔…▼

▽다쿠야〓월드컵 얘기부터 해볼까. 나는 한국, 일본을 떠나 순수하게 축구 그 자체를 즐겼어. 굳이 한일 공동개최의 의미를 얘기하자면 공동응원이 가능한 분위기가 됐다는 거지. 그래도 스페인전 때는 정말 흥분했단다. 한국 친구들과 같이 응원했는데 한국선수들 너무 잘하더라.

▽승희〓나도 응원하느라 신촌 길거리에서 살다시피 했어. 다쿠야는 축구를 즐겼다지만 나는 축구보다 축제를 더 즐겼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일본과 한국이 16강, 8강, 4강을 함께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흥분하니까 감정이 앞서는 거 있지. 일본이 시합에서 골을 넣었을 때는 ‘와, 일본 너무 잘한다. 어떡해, 우리가 일본보다 못하면…’하는 생각에 속도 상하더라. 하지만 일본이 우리팀을 응원했다는 보도를 보고 속 좁은 내 자신을 많이 반성했단다. 그런데 너희 일본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한국을 응원한 거니.

▽다쿠야〓일본이 졌을 때 안타깝긴 했지만 한국과 비교하진 않았어. 또 한국전이 계속 이어지니까 일본이 진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지. 사실 처음에는 한국이 16강 정도면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멋진 경기를 계속 보다 보니 꼭 결승전에 올랐으면 하는 기대도 생기더라.

▽승희〓그건 다쿠야만 그런 거 아냐.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랬니.

▽다쿠야〓물론 일본이 지고 한국이 이긴 걸 배 아파하는 친구들도 없진 않았어. 특히 심판판정 논란은 한국을 끌어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핑계가 됐지. 일본이 손해보는 것도 아닌데 한국이 오심 덕분에 이겼다고 믿고 싶은 마음 있잖아. 또 한국인에 대해 무섭다는 이미지를 가진 친구들도 있더라. 한국사람이 일본인보다 전체적으로 체격도 크고 힘도 세다고 하잖아. 그래서 한국이 결승전에 오르는 것을 겁내던 사람도 있긴 했단다.

▽승희〓이번 월드컵을 보면 응원에서도 양국의 문화차이가 분명했던 것 같아. 한국은 길거리 응원으로 모두들 집밖으로 뛰쳐나왔는데 그에 비해 일본은 너무 얌전했잖니. 일본 국민성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 특징이긴 하지만 남을 너무 신경 쓰다가 소중한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은 아니니.

▽다쿠야〓한국응원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꼭 그렇지는 않아. 한국은 어떻게 보면 집단주의, 전체주의 사회 같기도 하고.

▼월드컵이후엔…▼

▽승희〓한국이 월드컵에서 일본을 이겼다고들 하지만 그건 경기성적이 좋았을 뿐 대회진행 모든 면에서 우월한 것은 아니라고 봐. 그래도 한국이 월드컵으로 자신감을 얻은 것은 나쁘다고 보진 않아. 월드컵이 한일관계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니.

▽다쿠야〓일본에서는 더 마이너스로 돌아선 사람도 있고 플러스가 된 사람도 있는 것 같아. 강한 한국 축구, 뜨거운 응원열기를 보면서 원래부터 한국을 싫어하던 사람은 오히려 더 싫어하게 됐지. 그래도 무관심, 즉 중립적이었던 사람들이 플러스 쪽으로 돌아서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성과라고나 할까.

▽승희〓한국도 월드컵이 한일관계 개선보다는 한국 내 화합에 기여한 효과가 더 컸던 것 같아. 다만 역사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것 같던 양국이 역사문제를 접어두고서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 갖게 했지.

▽다쿠야〓일시적으로 가깝게 느낀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어. 대회 직전에 가장 가까워졌다가 지금은 오히려 관심이 식어버린 느낌이야. 내 경우도 월드컵이라고 해서 갑자기 한국을 더 가깝게 느끼진 않았어.

▽승희〓한일관계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걸까. 젊은 세대들이 다른 각도에서 풀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피해-가해 당사자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어른 세대보다는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 교과서 문제만 해도 서로 비난하기보다는 함께 고민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일본 교과서 문제를 공부하다 보니 한국 교과서도 문제가 많은 것 같더라.

▽다쿠야〓젊은 세대라 해도 역사를 덮어놓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봐. 젊은 세대는 책임이 없다거나 가해자, 피해자가 없어지면 문제도 없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일본이라는 국가가 한 일이니까 일본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처럼 국가 대 국가의 접근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 교과서 독도 어업 등 여러 문제를 모두 과거사와 관련지어 무조건 자기 나라만 옳다는 식의 접근은 옳지 않아. 분야별로 냉정하게 따져야지. 교과서는 한국주장이 옳지만 어업문제는 일본쪽이 합리적일 수 있잖아.

▼서로를 보고서…▼

▽승희〓화제를 돌려볼까. 한일 문화개방으로 요즘 양국간 문화교류가 활발하잖아. 다쿠야는 한국 문화 중 어떤 것을 좋아하니.

▽다쿠야〓영화랑 음악이 좋아. ‘쉬리’를 보고 한국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지. 그후 ‘8월의 크리스마스’ ‘박하사탕’ ‘리베라메’ ‘텔미 썸씽’ 등 거의 빼놓지 않고 봤어. 한국 영화는 일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시대성과 강한 이미지가 있어. 가수 중에서는 핑클을 좋아해. 핑클은 음악이나 댄스는 그리 잘하지는 않지만 순수하고 귀여운 것 같아. 승희 너는….

▽승희〓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화면이나 표현기법이 너무나도 서정적이잖아. 영화도 ‘러브레터’ ‘4월이야기’ 같은 서정적인 것이 좋아. 하지만 남자연예인들이 화장하고 나오는 거나 너무 일본적인 음악은 왠지 좀 거부감이 들어. 역시 일본 문화 속에서도 일본적인 것보다는 세계적인 것,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통하는 것 아닐까.

▽다쿠야〓얼마 전 일본 TV에서 한국남자랑 일본남자랑 비교하는 드라마를 했는데 승희는 일본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승희〓일본 남자? ‘꽃미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하라주쿠나 시부야 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데 가보니 실제로는 별로 없는 것 같더라. 전체적으로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있어서 매너가 좋을 것 같긴 해. 하지만 한국 남자 쪽이 무뚝뚝해도 정이 깊고 배려하는 마음이 많다고 할까. 다쿠야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지만 한국 여자는 어때.

▽다쿠야〓한국여자라서 특별히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생각한 적은 별로 없어. 다만 한국 여자는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고 당당한 것 같아. 한국은 남자들끼리는 선후배 의식이 뚜렷한데 여자후배랑 남자선배가 사귈 때는 위아래가 없는 것 같아 좀 이상했어. 또 가끔 보면 여자들이 장난치면서 남자를 막 때리는데 장난이 아니더라. 좀 어린애 같기도 하고….

▽승희〓앞으로 교류가 더 잦아지면 한일간에 연애하는 커플도 많이 나올 거야. 어른들 세대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연애하거나 결혼하면 이상하게 보고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 문제되는 시대는 아니잖아.

▼두나라 관계는…▼

▽다쿠야〓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을 재미있는 관광지 중 하나라고 여길 뿐,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 왜 있잖아. 한국에 가면 맛있는 음식 먹고 쇼핑하고 때 밀고 하는…. 그보다는 한국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알 수 있게 되는데 말이야.

▽승희〓그래. 한일 관계에서도 항상 한국쪽만 흥분해서 열받고 그러다가 제풀에 지치고 마는 것 같아. 일본 친구들 만나보면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몰라 좀 섭섭하더라. 물론 일본 친구들은 역사뿐 아니라 정치나 경제 사회 모두에 무관심하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 다쿠야 넌 좀 이상한 편 아니니. 일본애답지 않게 진지하잖아.

▽다쿠야〓그래도 모두 무관심한 것은 아니야. 요즘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고 있거든. TV강좌는 물론이고 학원도 많이 생겼고 대학에서도 한국어 강좌가 생겨나고 있잖아. 역시 문제의 해결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봐. 나도 2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 공부를 많이 하게 됐지.

▽승희〓어른 세대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우리 세대는 쉽게 만나 오해를 풀기가 쉽잖아. 각자 자기 나라에서만 듣고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나는 일본 친구들 만나기 전에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피해만 받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서로 얘기하다 보니 일본 친구들도, 나도 똑같이 충격을 받은 거야.

▽다쿠야〓한일 관계가 좋아져야 한다는데 너무 의무감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의무처럼 생각하면 오히려 부담스럽잖아. 개인적으로 취미를 갖듯이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뭐. 그래야 서로 자연스럽게 좋아할 수 있지. 반드시 뭔가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싫어.

▽승희〓어른들이 양국 젊은이들에게 국가대변자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라고 봐. 한국, 일본에 집착하기보다는 아시아, 세계 속에서 함께하는 동반자가 됐으면 해. 젊은이들끼리 함께 힘을 합쳐 다른 어려운 나라를 돕는다든지 할 수 있잖아. 그러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다쿠야〓그래. 먼저 친구들에게 한국에 여행부터 같이 가자고 할 거야. 그래서 한국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러고 나서 함께할 일도 찾아볼 수 있겠지. 다음에는 우리 서울서 만나 더 많은 얘기 나누자.

▼고바야시 다쿠야▼

△1978년 일본 사이타마현 출생

△도쿄대 교양학부 2년

△일한학생회의 위원장

△장래 희망은 동양사 연구가

△한국 여행 5번,

한국어 공부 2년

-한국친구들에게 한마디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언어. 상대국 언어를 열심히 배워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자.”

▼송승희▼

△1981년 한국 부산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2년

△한일학생회의 위원장

△장래 희망은 저널리스트

△일본 여행 첫 번째,

일본어 공부 1년반

-일본친구들에게 한마디

“민감한 역사문제에도 관심을 갖자. 서로 비난 두려워하지 말고 부닥쳐서 문제를 풀자.”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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