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자의 영웅은 TV 애니메이션 주인공인 ‘우주소년 아톰’과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였다. 아톰은 오래도록 기억돼 ‘컬트’로 자리잡았지만 마린보이는 점차 잊혀져 갔다. 인간의 시선이 하늘로만, 무한의 우주로만 뻗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우주 궤도에서 우주비행사들은 처음으로 지구라는 ‘별’을 만났다. 그들은 이 별이 ‘파란 바탕에 흰색 갈색 녹색 무늬를 지닌 대리석 공’ 같다고 말했다.
30년이 흐르는 동안 과학자들은 우주의 개발 가능성보다는 당장의 기술적 한계 쪽에 비중을 두게 됐다. 인류가 눈을 돌려야 할 다음 미개척지는 ‘무한 공간 저너머’가 아니라 ‘푸른 바다 아래’임을, 우주선 지구호를 감싸고 있는 눈 시린 청색 바탕화면임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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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의 3분의 2를 덮은 이 청색 세계를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팀이 3000일에 걸쳐 카메라에 담았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끝없는 북극의 얼음바다에서, 심해 1만4000m의 끝모를 해구(海溝)까지를 속속들이 탐험했다. 140억원이 투입된 프로젝트는 지난해 50분 분량의 영상 다큐멘터리 8편으로 완성됐고, 400여장의 컬러 화보가 담긴 다큐멘터리 북으로 출간됐다.
다큐 팀은 ‘바다의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작업으로 책의 첫머리를 연다. 인류에게 가장 친숙한 바다의 모습은 전체 면적의 8%가량을 이루는 수심 400m 이내의 대륙붕이다.
하지만 지구 위의 물 98%를 담고 있는 진짜 ‘저수조’는 수천 km 깊이의 해양분지다. 울퉁불퉁한 지구의 표면이 완벽하게 고르고 매끈한 공으로 변한다면, 이 공을 뒤덮을 바닷물의 깊이는 3700m에 이른다.
만약 이 엄청난 양의 물이 없다면? 지구를 지구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란 아무 것도 없다. 물은 온도를 높이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액체 중 하나다. 한밤과 한낮을 통틀어 바닷물의 온도차는 1도에 불과하다. 한낮의 태양광선을 받는 대지가 불타버리지 않는 것도, 한밤중의 세계가 냉동고로 변해버리지 않는 것도 지구를 덮은 이 거대한 액체 덕분이다.
도입부를 지나서야 책 전체를 뒤덮고 있는 주인공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곳에 삶의 터전을 대고 있는, 셀 수 조차 없는 수많은 생물들이 ‘어머니 바다’의 의미를 온 몸으로 일깨워준다.
알려진 육상생물 종(種)이 100만종 남짓인 반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바다생물은 150만종 이상으로 추정된다. 긴 항해를 떠난 카메라는 열대 온대 극지의 바다와 심해를 차례로 방문해 생김새며 버릇도 제각기인 주인공들을 비추고, 그들이 엮어내는 기적의 드라마를 차례로 건져올린다.
귀기울여 보자. 저 바다의 거대한 푸르름 아래에는 손에 잡힐 듯한 휴가의 추억이 녹아있고, 그보다 오랜 훨씬 먼 옛날의 기억이 침전돼 있다. 우리는 거기서 처음 눈과 지각을 얻었고, 등 하얀 자유로 떠돌던 피카이아(척추동물의 공통조상) 시절에 우리의 등뼈를 얻었다. 원제 ‘The Blue Planet’ (2001).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바다생물들의 X파일
▶덩치 큰 고래가 플랑크톤이나 크릴 등 작은 유영 생물을 걸러먹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사는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섭취하는 방법 중 하나다. 흰 긴수염고래 암컷은 몸무게가 최대 200톤에 달하는데, 혀의 무게만 해도 코끼리의 체중과 비슷하다.
▶상어의 후각은 극히 예민하다. 물고기 살이나 껍질이 물 속에 100만분의 1만 들어있어도 이를 감지하며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에 피 한 숟가락이 섞여도 이를 알아챈다. 상어 턱의 무는 힘은 1㎠당 3t이다. 엄지발톱 위에 세 대의 대형 승용차를 올려놓은 것과 같은 힘이다.
▶전기가오리는 먹이를 잡기 위해 몸 전체 부피의 3분의 1에 달하는 발전기관으로 1000와트의 전기를 발생시킨다. 이 때 푸른 불꽃이 튀는데 이 전기로 인해 잠수부가 때로 기절하기도 한다. 전기가오리는 동작이 워낙 느려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먹이를 잡을 수 없다.
▶코끼리물범 수컷은 몸무게가 5톤이나 되며 수심 1500미터까지 잠수한다. 수심 40m 아래에서 코끼리물범의 허파는 납작하게 눌려버린다. 이 때 심장 박동수는 동면할 때 수준인 1분에 6번으로 줄어든다. 코끼리물범이 1년에 여행하는 거리는 무려 2만5000km나 된다.
▶심해의 열수분출공은 지구의 깊은 내부에서 용암이 분출되는 장소다. 물의 온도는 최고 400도에 이른다. 이곳에서 자라는 ‘관벌레’는 입과 항문 등 소화기관이 전혀 없지만 2m까지 자란다. 이 곳의 생물들은 햇빛의 에너지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희귀한 생태계를 이룬다.
▶바위나 조개껍질이 부서진 다른 지역의 모래와 달리, 열대의 하얀 모래 해안은 산호나 다른 해양 생물의 골격이 침식돼 만들어진 모래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흰 모래는 대부분 ‘파랑비늘돔’처럼 산호를 뜯어먹는 동물의 배설물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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