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신경득씨는 1945년12월 당시 북한 행정구역이었던 강원 철원읍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이다 북한 정권과 옛소련에 의해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뒤 1946년 12월 28일 소련의 시베리아로 추방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47년 옥사했다.
당시 북한에서 신경득씨와 함께 반탁운동을 하다 구속돼 소련으로 추방당한 사람은 19명. 모두 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1947년 그곳에서 또다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차가운 이국땅에 유폐됐다. ‘반혁명 분자’라는 이유였지만 그들은 분단의 희생자,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었다.
수십년의 유형 끝에 그들 중 15명이 1990년 이전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4명은 1992년을 전후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제 2명만 생존해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끌려갔으니 신씨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생사를 확인한 것도 귀국한 15명의 한 명인 김효진씨를 통해서였다. 신씨는 1995년 명예회복을 위해 국회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자 국가 유공자 포상에 관한 청원’을 냈다.
그러나 국가유공자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고 현행법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올해 광복절을 쓸쓸히 보낸 신씨는 관련 자료를 한 뭉치 들고와 기자에게 하나둘 내밀면서 통한의 세월을 풀어놓았다. 1971년 하바로프스크 재판소에서 발행한 ‘이들 19인의 반탁운동은 범죄요건에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1947년 당시 판결은 무효’라는 내용의 문서도 들어있었다.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보다 우리 사회가 이 사실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서운합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아버지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들었는데…. 나이가 드니 아버지가 더 보고 싶어요.”
신씨는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