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민족통일대회 참석차 한국을 찾은 북측 대표단 116명의 환송 만찬이 열린 16일 저녁. 서울 광진구 쉐라톤워커힐호텔 무궁화볼룸에 마련된 환송회장에 들어서는 북한 대표단 중 분홍색 빨간색 파란색의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40여명의 여성 예술단원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북한에서 최고 미녀로 꼽히는 배우 및 무용단원이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처럼 현재 한국 사회에서 미인의 기준으로 꼽히는 가는 얼굴선, 콤팩트디스크(CD)만한 작은 얼굴, 쌍꺼풀 진 큰 눈, 165㎝ 전후의 키, 날씬하다 못해 비쩍 마른 몸매의 여성들이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끈 적은 없었다. 1985년 9월 남북 고향 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부터 시작해 1999년 12월 북한 농구대표단, 2000년 5월 북한 평양교예단 등 열 두 차례 북측 손님을 맞았던 쉐라톤워커힐호텔의 박광철 홍보과장은 “지금까지 봤던 북한 여성들 가운데 가장 서구적인 미인들”이라고 말했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짝퉁’ 명품백과 ‘너와 나’ 살결물
북한 여성 예술단원 중 서구적인 외모의 미인들은 주로 20대 초중반의 단원들이다. 특히 15일 쉐라톤워커힐호텔 제이드가든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남한 여대생 3명과 함께 한반도 단일기를 들고 입장했던 북한 여성 대표 3명 가운데 조명애씨(21)와 김숙영씨(24)에게는 언론 및 참석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16일 환송만찬장에서 쌍꺼풀은 없지만 얼굴 폭이 유난히 좁고 턱선이 갸름해 서구적인 느낌을 주는 김숙영씨 옆에 서로의 땀구멍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김숙영씨는 북측 기수단의 선두에 섰던 인물.
“가까이서 보니 더 고우시네요.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
“특별한 게 있겠습네까? 고조, 규정없이, 태어난 데서 미를 찾는 거디요.”
김씨의 피부는 건조해 보였고 ‘돌분’(북한에서 파우더를 가리키는 말)을 섬세하게 바른 듯했으나 ‘분크림’(파운데이션·‘피아스’ ‘환데’라고도 부름)이 묽었는지 그리 화장이 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색조화장은 안 했지만 ‘눈썹먹’(아이라이너)과 ‘아이라’(마스카라)를 꼼꼼히 칠했다.
“‘살결물’(스킨)이나 ‘물크림’(로션)은 어느 것을 쓰십니까?”
“하. 고조, 고것에 관해선 사연이 깊습네다.”
김씨는 잠깐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였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장군님께서 신의주에 있는 화장품 공장을 직접 다 돌아보시고. 아니, 우리 장군님이 얼마나 나라일에 바쁘십네까? 그런데도 여성들을 생각해서 보살핌을 해주신 까닭이지요. 덕택에 탄광에서 등대마을까지 결혼할 때 내장품으로 하나씩 다 배려해주시고, 질적으로다가도 또 포장까지 다 기호에 맞게, 그렇게 다 세심하게 만들어 주셨습네다. 저도 ‘너와 나’ ‘봄향기’(북한의 화장품 브랜드) 다 좋아합네다.”
“아, 네. 이번에 오신 분들이 한결같이 미인이셔서 혹시 ‘성형수술’은 하지 않았나 샘을 내는 남한 여성들도 있었는데….”
“예? 뭐라고요?”
그는 ‘성형수술’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듯 되물었고 ‘예뻐지기 위해서 얼굴을 고치는 것’이라고 설명하자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런 것, 일 없습네다.”
우연히 의자 등받이와 허리춤 사이에 끼워놓은 김씨의 황토색 가방을 봤다. 지퍼부분과 가방 앞부분에 작은 메두사 머리가 박힌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베르사체’ 것이었다. 색상이나 지퍼 부분 끝 마무리를 보아 진품은 아닌 듯했다.
북에서 온 여성들 가운데는 김씨 것 외에도 대부분 ‘짝퉁’인 듯하기는 했지만 클래식한 디자인의 샤넬, 루이뷔통 에피라인 등 명품 브랜드 가방을 들고 나선 이들이 꽤 있었다.
입국 당시부터 ‘8·15 스타’로 조명받았던 조명애씨는 아나운서 황현정씨의 입매, 한때 청순함의 대명사로 꼽혔던 탤런트 황수정씨의 눈과 코를 조화롭게 섞어놓은 듯한 외모다. 얼굴에 군살이 전혀 없고 목 또한 길다. 조씨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 의 말발굽 모양의 로고, ‘간치니’가 박힌 갈색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간치니 로고 바로 위에 또 다른 명품 브랜드 ‘구치’의 ‘G’ 마크를 연상시키는 로고도 함께 붙어있어 이 역시 ‘짝퉁’인 듯했다.
“이곳에서도 조 선생님처럼 얼굴이 작은 게 미인형인데 북한에서도 그런가요?”
“그렇습네다. 그렇지만 저 말고도 평양에 오시면 미인들이 아주 많습네다.”
“북한에서는 화장품이 비싸다던데. 외제는 안 쓰세요? ”
“(손사래를 치며) 아뇨, 비싸지 않습네다. 저는 국산만 씁네다.”
속눈썹이 유난히 긴 조씨는 마스카라는 하지 않았으며 대신 아이라이너를 두껍게 칠해 눈동자가 선명해 보였다.
대부분의 북한 예술단원들은 당차고 친절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몸을 세워 테이블 내 다른 참석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들의 ‘짝퉁 명품백’은 “해외 공연은 주로 중국에서 한다”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중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국내 ‘명품족’처럼 브랜드 자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녀들’이 달라졌다
성형외과, 피부과 전문의들은 이번 북한 여성예술단원들의 외모로 볼 때 북한의 미인 기준이 급격히 서구화하고 있음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예전에는 얼굴의 가로 세로 비율에 있어 미인의 기준이 남한 1 대 1.5, 북한 1 대 1.3 정도로 북한이 더 둥근 얼굴을 선호했다. 특히 조씨는 콧등이 오똑하고 코끝이 살짝 들린 형태인데 이는 남한여성들이 코 수술을 할 때 모범답안으로 삼는 모양이다.” (타임필 피부과 김성완 원장)
“몇년전 중국에서 한중의학학회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대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여성들의 얼굴 윤곽과 체형이 서양인에 가까웠다. 북한 여성들 가운데도 남한 여성에 비해 키가 크고 사각턱 비율이 적은 ‘베이징형 미인’ 비율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서울 성형외과 이민구 원장)
대한미용성형학회 국제교류과 정섬 상임이사(성형외과 전문의)는 “옌볜의 동포 의사들에 따르면 북한에는 성형 전문 외과는 없으나 예전부터 치료, 미용의 목적으로 일부 대형병원에서 간단한 성형 시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하지만 미용성형에 대한 관심이 많아 중국 옌볜이나 일본으로 원정 수술을 받으러 가는 경우도 더러 있으며 이럴 경우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는 표면상으로는 치료의 목적이 우선이므로 ‘성형(成形)’대신 ‘정형(整形)’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북한의 미인 기준의 변화는 각종 북한 보도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노동당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여배우 김정화(48)가 인민배우 홍영희(47)와 오미란(48)을 제치고 …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명배우로서의 자랑을 떨쳤다”고 보도한 것도 짙은 쌍꺼풀, 늘씬한 키 등 서구적 미인의 전형인 김정화가 동그랗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옛 북한 미녀’를 제친 사례로 꼽힌다.
●북녀(北女)들의 화장 문화
지난해 서울대 소비자학과 이기춘 교수팀은 ㈜태평양의 의뢰로 북한에서 연예 활동을 한 탈북자, 옌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북한 여성들의 화장 문화에 대해 연구했다. 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북한 여성들 스스로 ‘옥수수죽을 먹어도 화장품은 고급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크다”고 답했다.
2000년 12월에 완공된 신의주화장품 공장에서 생산되는 ‘봄향기’ 등은 인기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생산량이 적은 데다가 값이 비싸 광범위하게 보급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화장품 빌려달라는 말은 자동차 빌려달라는 말과 같다”는 ‘격언’이 나돌기도 한다.
대안으로 북한 국영화장품보다 질이 낮지만 값이 싼 중국제를 사용하는 여성들도 많으며 당 간부 가족 등 일부 계층은 프랑스제와 일본제를 선호한다. 화장 순서는 일반적으로 살결물→물크림→돌분이 전부. 멋쟁이들은 여기에 눈썹연필과 아이라, 구홍(립스틱)을 곁들인다. 이기춘 교수는 “북한 여성들은 대개 기초 화장을 중시하며 색조 화장품은 많이 보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화장품 질이나 화장 테크닉은 ‘남한의 1980년대 수준’으로 평가된다. 방한한 예술단의 화장법을 분석한 태평양 미용연구팀의 왕석구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짙고 평형에 가까운 눈썹 △건조한 느낌의 파운데이션 △립글로스 대신 건조한 립스틱을 바른 점 △얼굴과 목선 화장의 색 경계가 심한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화장술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고 평했다.
세련도에 있어 큰 발전이 있음은 패션부문에서도 포착됐다. 이들이 창덕궁 나들이에 나서면서 입은 평상복을 분석한 패션정보회사 모다뉴스 조현옥 편집장은 “우리나라 중년 여성들도 즐겨 입는 슈트의 실루엣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는 넓은 어깨선,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소매 길이, 테일러드 칼라 등이 역시 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었다.
3박4일의 짧은 여정을 통해 잠깐씩 노출된 여성 예술단원들의 모습은 그 지향점이 서구적인 미(美)라는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미의 기준이 닮아간다는 점에서 연대감을 심어주는 듯했다.
“결국 사람이란 사상의 껍질을 벗고 나면 큰 차이가 없으며 단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비슷한 존재들 아닌가. 북쪽 사람들과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해 애써 서로 다른 기준을 들이댈 필요가 없어진 점을 보고 잠시나마 기분 좋았다.”(예성형외과 박선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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