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도 ‘뱅쌩캉’도, ‘바자’도 아니다. 웬만한 패션잡지보다 더 현란한 사진과 영어 섞인 제목에 호기심이 앞선다. 무엇에 쓰는 물건들일까.
서울 교보문고 15번 매장 ‘중고생 참고서’ 코너. 2학기를 앞두고 중고교용 과목별 참고서와 수능대비 교재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중고생 참고서’라는 안내표지판이 아니라면 잡지 코너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수능참고서인 ‘해피 2003’. 올해 공부 열심히 해서 내년에 행복하자는 취지는 알겠지만 정작 표지의 ‘언어영역’ 이라는 글자는 첫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표지에는 그룹 ‘신화’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 ‘FRJEANS’ 청바지 광고와 신화의 사진 18장을 더 구경할 수 있다. ‘수능예상문제’ 단원의 제목은 ‘수능예감’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참고서 매장 기둥에는 버버리 코트를 입고 잔뜩 폼을 잡은 중년남자의 흑백 전신사진이 붙어있다. 음반매장에 붙어있는 장동건 브로마이드와 유사한 컨셉트. 삐침머리, 패셔너블한 안경, 실크넥타이 등에서 ‘B급 연예인 사진첩’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의 모델은 학원강사인 엄인경씨. 엄인경(지구과학) 김봉호(윤리) 이규돈(화학) 등 학원강사들이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걸고 낸 ‘대한민국 최고강사 수능특강 벼락치기’시리즈의 광고사진이다.
엄인경씨(정진학원 강사)는 “문제집의 저작권이 중요시 되면서 예전에 통용되던 ‘약간의 짜깁기’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내 방식대로의 문제집’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책의 사진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수능 예상문제집인 ‘수능 족집게 700선’. 왕가재가 집게를 펴고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까지는 좋았다.전원 대학생인 20명의 저자들이 겉봉투에 다양한 포즈의 스티커 사진을 붙여놓았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오늘 준비된 미래를’처럼 수필집 형태의 서술형 제목을 단 예상문제집도 눈에 띈다.
도심의 교보문고와 강남 코엑스몰의 반디앤루니스의 수학참고서 선반. ‘FEEL 수학’ ‘라이브 수학’ ‘패스워드 수학’ ‘생생 수학’ ‘알레 수학’ ‘알지 수학’ ‘카리스마 수학’ ‘오렌지 수학’ ‘뷰(VIEW) 수학’ ‘본(BONE) 수학’ ‘벨 수학’ ‘대치동 수학’ ‘메가매스’가 꽂혀 있다. 다른 과목도 다양한 수식어를 제목에 동원한다. ‘아름다운 사회’ ‘똥침 국어’ ‘튀누마 국어’ ‘뽁각 국사’ ‘다다 영어’ ‘우쒸 영어’ ‘회오리 생물’ ‘JAMMMMY WWWWOLLY(재미와 원리)’ ‘GOSU(고수) 과탐’….
EBS 영어강사 이근철씨는 “요즘은 고교용으로도 3색 이상의 컬러를 사용한 편집이 기본이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학생스러운’ 용어사용과 노트필기체로 중요사항을 첨언해 놓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치”라고 말했다.
과거 ‘완전정복’시리즈의 나폴레옹도, ‘필승’에 나오는 허들을 뛰어넘는 올림픽 선수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표지에 등장하는 사과 딸기 통조림 찻잔 식칼 등은 차라리 진부한 일러스트다. 메시지가 모호한 요즘의 CF처럼 한참을 감상하고 생각하게 만든다.허름한 주택에 안테나가 달려 있는 음침한 추상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게 만든 반투명 거울, 워크맨을 끼고 힙합의상을 걸친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흑인….
출판업계 관계자들은 참고서 시장의 경우 교학사 지학사 한샘 두산동아 등 10여개 메이저 업체들 외에 최근 몇 년 새 200여 업체가 새로 뛰어들었다고 전한다. 달아오른 교육열로 인해 참고서 시장의 파이가 커졌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자기 ‘상품’을 알리기는 더 힘들어졌다. 표지부터 소비자의 눈길을 단숨에 잡아당기는 각축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전과 다른 디자인의 참고서는 팬시상품 기능도 한다. 딸이 고1에 재학중인 학부모 김윤선씨(44·서울 양천구 신정동)는 “예전 학생들이 예쁜 노트나 필기구 모으던 것처럼 요즘 애들에게는 ‘참고서 사치’가 생겼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일단 디자인이 맘에 든다며 책가방에 넣어 다니니까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대안 교과서’를 표방하는 참고서들 역시 기성세대의 시각으로는 ‘그저 재미있는 책’이다. 국어참고서 ‘우리말 우리글’에서는 ‘삶과 사랑’을 소재로 삼은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단원에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의 영화포스터를 싣고 ‘우리가 만드는 이야기’ 단원에는 ‘수다맨’ 강성범이 ‘개그콘서트’에서 사람들을 웃기는 사진을 곁들였다. 만화도 비중있게 들어간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예전 교재라면 ‘권문세족의 득세’라 제목 달았을 단원을 ‘권문세족,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고 표현했다.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