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을 모르는 철학자는 없다. 나도 수 많은 다른 철학가들처럼 그에게 매료되어 왔다. 물론 그의 철학적 천재성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매료되어 있는 더 깊은 이유는 그의 ‘인간됨’, 그의 ‘삶에 대한 자세’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었나? 나는 늘 궁금했었다. 몽크의 본격적인 전기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은 궁금증을 어느 책 보다도 잘 풀어준다. 이 전기를 통해 나는 인간 비트겐슈타인을 좀 더 알게 되면서 이 철학자의 삶에 대한 태도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인간됨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실존적 문제였다. 그는 논리학자에 앞서 윤리적 인간이었으며, 철학자에 앞서 구도자였다. 평생을 통한 그의 구도적 자세는 8세였던 어린 나이에 “거짓말을 하면 자신에게 유익한데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윤리적 물음을 던진 데서 비롯된다.
그는 가정적으로 화려했지만 삶은 비극적이었다. 유럽 합스부르그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 철강업을 하는 갑부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한 두 형처럼 늘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할 생각에 항상 빠져 있었다 한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영국 만체스터 대학에서 항공기 공학을 전공하기 시작했으나 23세때인 4년 만에 포기하고 켐브리지 대학으로 가 러셀의 논리철학 강의를 청강하면서 본격적인 철학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6년 후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방법을 제시했다”는 오만한 말을 덧붙인 ‘논리 및 철학 논고’를 스승 러셀에게 보낸다. 러셀은 이 외국인 학생의 철학적 ‘천재성’에 경탄해 3년 후 책으로 출판됐을 때 직접 긴 해설과 격찬의 서문을 써 준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의 ‘드 트로 (de trop)’, 즉 잉여물,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살하지 못하고 살아 남았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괴로워했었는데, 러셀의 인정을 통해 비로서 극복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위대한 삶은 일약 세계적 철학가로 떠오른 그 이후부터다. 철학적 문제를 ‘수정처럼 투명하게’ 영원히 풀었다고 확신한 그는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확인 받은 뒤 켐브릿지를 훌훌 떠나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 가려고 시도하다 뜻대로 안되자 그 곳 정원사 조수로 일하다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따서 6년 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거액의 재산을 당시 비엔나에 살던 시인 릴케와 젊은 시인 트락켈을 비롯해서 예술가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선단체에도 기증했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수도승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두 스승 러셀과 무어의 권유에 따라 1925년 켐브릿지 대학으로 돌아와 강의를 하고 4년 후에는 은퇴한 무어 교수의 자리를 계승받는다. 그러다, 47세 되던 1936년에 두 번째 대작 ‘철학적 탐색’에 전념하기 위해서 대학을 떠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철학교수였으면서도 “대학은 철학할 장소가 아니며, 교수직이 참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같이 느껴진다. 인류와 신 어느 것에도 관련이 없다면 이방인 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간됨을 향상시킬 수 있다”며 두 번의 세계대전에 지원했으며 당시 자신은 “국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또 “네 자신을 수양하라. 그것이 세계를 향상시키는 데 네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내가 쓴 거의 모든 것들은 나 자신과의 사적 대화이며, 내 자신에 대해 내 자신과 머리를 맞대고 내가 말한 것들이다”고 말해 그의 삶이 자기와의 정신적 싸움이며 자기 수양을 위한 고행 과정이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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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된 관심은 정치나 사회적 사안이 아니라 개인적 구원이었으며, 그에게 구원의 문제는 어떤 종교적 교리를 추종하는데 있지 않고,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자신의 내면적 목소리에 진실할 수 있는가 라는 윤리적 문제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엄숙하고 숭고하며, 인간으로서의 그는 위대하고, 아름답다. 그는 문학 속의 주인공 안티고네와 카르멘 같은 정신적 귀족에 속한다. 생물학적으로 우리 일반 인간들과 다를 바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보다 높은 다른 차원의 종에 속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에 비해 철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걸레 같다는 느낌이 들어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몽크의 재미나는 소설같이 읽히는 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진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정신 위생학적으로도 귀중한 양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만도 이 책의 번역출판의 의미는 크다.
박이문 철학자·전 포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