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날인 25일 낮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는 팔순인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마 교수는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노모와 단 둘이 살고 있다. 노모는 “아들이 전날 밤부터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방금 잠이 들었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해 달라”고 했다. 저녁에 전화를 했을 때 다행히 그는 깨어 있었다. ‘집으로 찾아가 한번 만나고 싶다’고 다시 제의했지만 그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결국 전화로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 울화통을 “병원에서는 우울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위가 안 좋아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간이 안 좋아 쉬 피로해지기 때문에 문밖 출입도 거의 하지 못한다”고 했다. 기력이 쇠해 책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TV 신문 등도 거의 보지 못한다. 몇 달 전부터는 모잡지에 기고하던 연재도 그만두고 그저 집에서 하루종일 누워 넋이 빠진 듯이 지내고 있다. 전화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이미 심각한 증세를 전하고 있었다. 말과 말의 연결이 자주 끊겼고 끝맺음도 흐지부지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간신히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강단서 ‘잘린’것 내 생애 가장 큰 쇼크▼
마 교수는 전화통화 도중 여러 차례 “사람이 무섭다”고 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집밖에도 잘 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친구(동료)가 무섭다”는 말도 했다. 그 말 속에는 학교의 가까운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감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병은 2000년 6월 마 교수가 재임용과정에서 ‘교수로서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데서부터 시작됐다. 마 교수는 “잘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동료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교수직에서 쫓겨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쇼크”라고도 했다. 아내와 자식이 없는 그로서는 학교가 직장이면서 가정이기도 하다. 특히 모교인 연세대 국문학과는 그가 69년 대학에 입학한 이래 홍익대 조교수를 지낸 몇 년을 빼놓고는 30년 가까이 몸을 담은 곳이다. 그로서는 단지 교수직을 잃은 것이 아니라 직장과 가정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좋아하는 학생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죽을 지경이다”라는 말로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극심한 상실감을 표현했다.
2000년 당시 학과 인사위원회가 밝힌 부적격 판정 사유는 ‘논문실적이 없다’였다. 이에 마 교수는 ‘논문을 쓰지는 못했지만 나는 교수일 뿐 아니라 작가이기도 한데 그동안 써온 수필 소설 등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수긍할 수 없다’며 항의했다. 그는 그 즈음 ‘자유에의 용기’ ‘인간’ 등의 수필집과 몇권의 소설을 냈었다. 대학 중앙인사위원회는 그 소명을 일부 받아들여 재임용 문제를 1년간 유예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학과 인사위원회측은 ‘우리는 마 교수를 작가로서가 아니라 연구자로 임용한 것’이라는 이유로 다시 부적격을 상신했다. 결국 마 교수는 재임용된 것도 아니고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타협책으로 휴직원을 내고 말았다.
당시 학과 내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마 교수의 부적격 판정이 단지 학문적인 이유만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의혹들이 제기됐다. 국문학과 홈페이지에 그 결정에 대한 찬반의 글이 실리기 시작했으며 일부 글들은 부적격 판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특정 교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학과에서는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 교수는 ‘잘린 것’은 아니다. 잘린 것과 다름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연대 교무처 관계자는 “마 교수는 휴직상태”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마 교수가 2000년 6월 1년간 휴직계를 내고 쉬었다가 지난해 가을학기에 복직해 한 강좌를 맡았으며 올 초 다시 1년간 휴직계를 낸 후 쉬고 있다”며 “휴직 이유는 건강 악화”라고 전했다.
▼“누군가를 만나는것 자체가 무서워”▼
마 교수는 작년 가을학기 학부과정 3학년의 ‘문예사조사’ 강좌를 맡아 부분적으로 강단으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마 교수 자신은 “올 봄학기에는 전공 교양 대학원 등의 4, 5개 과목을 맡아 완전복귀를 할 생각이었다”고 말했지만 단 한 강좌도 맡지 못했다.
이번 가을학기에도 그에게는 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버틸 기력이 없다”고 했다. “학교에 나가 누군가를 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고도 했다. 휴직은 연말까지 유효하지만 그는 가을 신학기를 앞두고 최근 학교내 지인에게 우편으로 사표를 보냈다. 마 교수는 전에도 두 차례 사표를 낸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를 생각한 한 학과교수가 중간에서 돌려보냈다. 이번에도 중간에서 가로채인 것인지 사표는 아직 학교에 전달되지 않았다.
▼‘외설’ 소설의 최대피해자는 마교수▼
마 교수는 지금 ‘즐거운 사라’를 쓴 것을 후회한다. “그 책 때문에 내 인생이 뒤바뀌었다”고 했다. ‘나같이 겁 많고 마음 약한 사람이 검찰에 잡혀갈 줄 알았으면 그런 책을 썼을까’ 스스로 반문해 보기도 했다. 기자에게 “성(性)을 다뤄 망했다”고도 했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후회한다”고도 했다. 92년 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아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 98년 사면복권이 되면서 복직하긴 했지만 학생들의 환영과는 달리 일부 동료교수들로부터는 말끝마다 ‘그걸 소설이라고 썼느냐’는 비아냥을 받아야 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시기인 40대의 전부를 온통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시달려온 게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97년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써서 역시 음란문서 제조죄로 구속된 바 있는 작가 장정일씨는 96년 출간된 그의 책 ‘독서일기 3’에서 이렇게 썼다.
‘4년 전(92년) 마광수 교수의 필화 사건이 났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마 교수를 청소년 성문란과 우리 사회의 성타락을 부채질하는 원흉으로 봤고, 사법부 역시 그만 단죄하면 건전한 사회가 온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그후로 4년 동안 성범죄는 줄어들지 않았으며….’
‘즐거운 사라’에 대한 형사 처벌 이후 10년. 성범죄는 걷잡을 수 없이 늘었고 검사들의 눈에는 ‘즐거운 사라’를 무색케 하는 외설이 넘쳐나고 있다.
노모와 함께 하루종일 아파트 안에서 누워 지내는 중년의 무력한 남자를 떠올려본다.
뒤돌아보면 ‘즐거운 사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청소년도 우리 사회도 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그 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마광수 자신이었던 것이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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