眼-눈 안隱-숨을 은 遁-달아날 둔
避-피할 피叱-꾸짖을 질 糞-똥 분
魏晉南北朝(위진남북조)라면 제2의 春秋戰國(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큼 혼란했던 시대였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으며 장군들이 활개를 쳐 문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시대다. 그래서 선비들은 세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산림에 隱遁(은둔)해 술이나 마시면서 울분을 삭이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자연히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생각보다는 소극적이면서 避世的(피세적)인 생각들을 갖게 되었는데 이런 경향은 특히 지식인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人倫(인륜)이나 禮儀(예의) 따위를 논하기보다는 그저 한 목숨 연명하면서 조용히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연히 孔子(공자)나 孟子(맹자)의 일사불란한 가르침보다는 老子(노자)나 莊子(장자)가 내뱉듯이 한 말이 더 피부에 와 닿았다. 富貴功名(부귀공명)이 무엇이기에 한 세상 살아가면서 그다지도 안달복달할 것인가?
그런 사람들의 대표가 竹林七賢(죽림칠현)이었다. 晉나라 초 전란을 피해 草野(초야)에 묻혀 살았던 도사 비슷한 사람들을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름한 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호로병을 찬 채 洛陽城(낙양성) 밖의 대나무숲을 찾았다. 종일 마시면서 시나 짓고 혼탁한 세상을 叱咤(질타)했다.
竹林七賢의 대표격에 阮籍(완적)이라는 자가 있었다. 천자로부터 누차 관직을 제의받았지만 그럴 때마다 ‘미친 놈!’이라며 거절했던 사람이다. 그의 눈에 富貴功名(부귀공명)이란 한낱 뜬구름에 불과하며 인륜예의는 糞土(분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호탕하고 술 좋아하기로는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들 슬퍼 야단들이었지만 그만은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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