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패티 김 노래인생 43년…18,19일 세종문화회관서 콘서트

  • 입력 2002년 9월 9일 17시 54분


18,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둘째딸 카밀라, 바리톤 최현수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 ‘스탠더드 팝의 여왕’ 패티김(오른쪽). 패티김이 1966년 작곡가 박춘석(왼쪽) 길옥윤 등과 함께 ‘주월군 레코드 보내기 운동’에 참여해 자신의 레코드판을 기증하고 있는 모습.

18,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둘째딸 카밀라, 바리톤 최현수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 ‘스탠더드 팝의 여왕’ 패티김(오른쪽). 패티김이 1966년 작곡가 박춘석(왼쪽) 길옥윤 등과 함께 ‘주월군 레코드 보내기 운동’에 참여해 자신의 레코드판을 기증하고 있는 모습.

《카리스마를 겸비한 ‘스탠더드 팝의 여왕’ 패티 김이 18, 1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콘서트를 갖는다. 김정택이 지휘하는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SBS 팝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아 클래식과 스탠더드 팝이 어우러진다. 가수 데뷔를 준비중인 패티 김의 둘째 딸 카밀라와 바리톤 최현수도 함께 무대에 선다. 음악 평론가 강헌씨가 패티 김의 가요사적 의미를 짚었다. 공연 문의 02-783-0114 》

50년대 초중반 한국 전쟁의 폐허 위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이 울려 퍼졌고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급격하게 미국 문화의 자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하여 미8군 무대는 새로운 한국 대중음악사의 진원지가 되기 시작했다.

50년대 미국 백인 사회를 장악했던 금발의 스탠더드 팝 뮤지션 패티 페이지에게서 이름을 딴 패티 김의 신화는 1959년에 탄생의 고고성을 울린다. 그리고 60년대의 개막과 함께 열린 TV 시대에서 그는 매혹적인 풍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보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브라운관과 리사이틀 무대의 디바(diva·여왕)로 떠올랐다.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에 이어 제3공화국이 출범하는 이 즈음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1930년대부터 한국 대중음악사를 장식해온 이난영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이미자가 새로운 ‘엘레지의 여왕’으로 떠올랐고 패티 김은 그 반대편 봉우리에서 작곡가 길옥윤과 함께 한국 스탠더드 팝 시대를 개막시켰다.

패티 김의 목소리는 장르의 한계를 초월한다. ‘대형가수’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Padre’나 ‘Till’을 비롯해 패티 페이지의 노래같은 서구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며 서구 대중 음악의 한국 상륙을 완성시켰다. 그는 최창권의 뮤지컬 수록곡인 ‘살짜기 옵서예’와 길옥윤의 ‘사월이 가면’을 통해 출중한 가창력과 세련된 무대 맵시를 선보이며 60년대말 이후 길옥윤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1969년의 ‘사랑하는 마리아’에서 이듬해 ‘사랑이란 두 글자’와 ‘사랑하는 당신이’, 그리고 파격적인 판탈롱 패션을 선보인 1971년의 ‘님에게’로 이어지는 ‘사랑의 행진’은 패티 김의 성가를 드높였다.

즈음 함께 선보인 ‘대한민국 찬가’와 ‘서울의 찬가’, ‘능금꽃 피는 고향’(대구 예찬 노래)은 패티 김에게 ‘국민 가수’의 휘장을 안겨주었다. 1974년 동경 가요제 출품곡 ‘사랑은 영원히’에 이르러 패티 김의 보컬은 드라마틱한 오페라적인 경지를 획득하며 절정의 표현력을 구가한다. 그러나 그는 길옥윤과 결별하면서 ‘이별’을 끝으로 자기 음악 이력의 제1막을 닫았다.

길옥윤과 동반한 그의 음악은 한국 스탠더드 팝의 한 전형이었다. 그는 빅밴드와 화려한 뮤지컬 사운드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사랑과 이별의 감성을 능수능란한 템포로 조율했다. 이들 콤비의 음악에서 청승맞고 어두운 그늘은 없었다. 확신으로 가득찬 패티 김의 발성은 한국 스탠더드 팝의 완성을 알리는 일종의 마침표나 다름 없었다.

길옥윤과 헤어진 뒤에도 패티 김은 또 한사람의 위대한 작곡가 박춘석과 호흡을 맞춰 지금도 팬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곡들을 쉬지 않고 분만한다. 1977년과 1978년에 발표한 ‘추억 속에 혼자 걸었네’와 ‘못잊어’는 음악 이력의 제2막을 여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이 노래들에게서 묻어나는 유장한 음영은 후배 가수들이 감히 흉내내기 어렵다.

히 1983년 박춘석과 콤비를 이룬 노래 중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70년대의 명곡 ‘사랑이여 다시 한번’과 대구를 이루는 가곡풍의 걸작이다. 그 뒤에도 패티 김은 박춘석과 ‘사랑은 생명의 꽃’ ‘사랑은’ ‘사랑은 멀어지고 이별은 가까이’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팬들에게 안겨줬다.

패티 김은 한 밀레니엄이 저무는 마지막 해인 1999년, 데뷔 40주년을 맞아 기념 음반과 공연을 성황리에 치러냈다. 이로써 그는 너무나 허망하게 조로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불문율 아닌 불문율의 벽을 치열한 자기 관리로 넘어선 몇안되는 거장임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패티 김과 그의 노래는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살아있는 박물관인 것이다.

강헌 음악평론가 authodox@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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