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남자의 냄새

  • 입력 2002년 9월 12일 16시 10분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 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강신재가 1960년 발표한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대목은 언제 읽어도 풋풋하다. 좋은 냄새가 나는 남자는 여자의 기분을 퍽 좋게 한다.

애석하게도 30대 초반 A씨(여)의 ‘그’(남편·30대 후반)에게서는 언제나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난다.

그가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한다거나, 호텔 일식당에서 생선을 요리하는 일을 한다면 또 그러려니 하겠다. 그러나 그는 화이트칼라 회사원이다.

A씨는 냄새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그의 하루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오전에 출근할 때 양치질을 하지 않았다가 잠자리에 들기 직전 하루 딱 한번 이를 닦았다. 심연 같은 목구멍으로부터 풍겨나오는 비릿한 냄새는 그러나 치약의 박하향을 늘 압도했다.

그는 샤워도 하루 한번은 꼭 했다. A씨는 열린 욕실 문을 통해 탐정 셜록 홈스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그가 샤워하는 모습을 엿보기로 했다. 뜻밖에도 그는 비누 거품을 풍성하게 만들어 구석구석 몸을 닦았다. 하지만 샤워 30분 후면 그의 몸에서는 영락없이 생선 냄새가 되살아났다.

A씨가 핀잔하듯 그의 몸 각 부분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내게서 꽃향기가 나면 남편이고, 생선 냄새가 나면 동네 아저씨냐. 이왕이면 남편의 향기라고 불러줘.”

물론 휴고 보스, 캘빈 클라인 이터너티, 겐조 옴므 등 시원하고 남성스러운 향수를 매일 뿌리고 다니는 멋쟁이 남자들은 때때로 여자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외모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왕자형’일 경우가 많다. 여자에게 ‘자신의 냄새에 민감한 남자는 여자의 냄새 또한 예민하게 간파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A씨의 이성은 남편과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분주히 움직인다. 감성의 로맨틱한 활동이 개시되기도 전에 A씨의 이성은 ‘이번엔 그의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날까’라고 민방위 훈련하듯 대비를 하는 것이다.

롤러코스터 승차감 같은 짜릿한 키스의 감촉은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것이다. A씨의 키스에 대한 정의는 냉정하다. ‘키스는 기습적으로 다가올 냄새에 촉각을 세우고, 물컹물컹한 입술 두 쌍을 교차하는 행위이다.’

오랫동안 비염을 앓은 남편이 자신의 냄새는 물론, 각종 생활의 냄새에 둔감하다는 대목에 이르면 사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심지어 그가 방귀를 뀔 때는 생선 냄새와 고구마 냄새가 적당한 비율로 혼합돼 인간 정신은 혼미해지고, 집안은 융단 폭격을 맞은 듯 황폐해진다.

그러던 어느날. 대형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A씨는 화들짝 놀랐다. 옆에서 남편의 바로 그 생선 냄새가 솔솔 풍겨왔던 것이다. A씨는 고개를 홱 돌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꾀죄죄한 인상의 청년이 역시 책을 고르고 있었다. A씨는 남편만의 독특한 냄새를 또 다른 남자에게서 느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뒤, 등을 활처럼 구부려 발톱을 깎고 있던 남편에게 A씨가 확인하듯 물었다.

“나랑 연애할 때는 칫솔을 양복 속에 넣고 다니며 하루에 몇 번씩이나 양치질했지?”

그는 멋쩍은 듯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더니 대답했다.

“아니, 그때도 매일 밤에만 하루 한번 이를 닦았어.”

A씨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연애시절 밥 먹듯 키스할 때는 남편 몸의 생선 냄새를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혼 전 눈만 멀은 것이 아니라, 코까지 멀었단 말인가.’

A씨는 비로소 남편을 바라보던 환상의 안개가 걷히고, 남편을 향한 자신의 열정이 결혼 전에 비해 현격히 사그라든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열정이 있던 자리에 부부간의 인간애가 대신 자리잡아준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득 A씨는 아주 먼 훗날 그의 몸에서 나는 생선 냄새를 한없이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에게 있어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강렬한 기억이니까. A씨는 남편의 몸을 정답게 부둥켜 안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집을 나서며 A씨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아아, 남편의 입과 몸에서 나는 지독한 생선 냄새는 A씨가 전날밤 느꼈던 부부애와 낙관적 생활태도를 단번에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