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 미술 현장진단]상업적 전시 매몰… 색깔이 없다

  • 입력 2002년 9월 15일 17시 17분


미술인들은 국내 미술관과 갤러리가 차별화된 개성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관람객들이 한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미술인들은 국내 미술관과 갤러리가 차별화된 개성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관람객들이 한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미술관인지 갤러리인지 구분할 수 없다. 미술관은 공익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고, 갤러리는 잘 팔리는 작가의 작품에만 매달려 기획전 하나 제대로 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서양화가)

미술관과 갤러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한국 미술계는 그 차이도 모르고 자기 몫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미술관은 전국 60곳, 서울 23곳(문화관광부 통계)이고 갤러리는 전국 360여곳, 서울 210여곳(김달진 미술연구소 추정)에 이른다. 하지만 미술관과 갤러리의 운영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 미술은 앞서 나갈 수 없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차이〓미술관은 사설일지라도 공익을 추구해야 하고 갤러리는 미술 작품으로 영리를 도모하는 상업 공간이다. 미술관은 공익을 위한 요건을 갖춰야만 허가를 받을 수 있고 갤러리는 개인 사업자가 신고만 하면 된다. ‘박물관 미술관 진흥법’ 시행령에 따르면 미술관은 소장품 100점 이상, 전문 연구 인력(큐레이터) 1인 이상, 전시공간 수장고 자료실를 갖춰야 한다. 미술관은 작품을 판매할 수 없고 연구 교육도 해야 하며 세제혜택도 받는다. 그러나 갤러리는 작품을 언제든지 팔 수 있다. 그에 따른 세금도 내야 한다.

▽개성없는 미술관〓미술관의 전시 및 연구는 소장품 중심이어야 한다. 사비나미술관의 이명옥 관장은 “그래야 미술관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고, 특유의 색깔로 차별화되는 미술관들이 많아야 한국 미술이 풍료로워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런 미술관은 손꼽을 정도다.

미술관들은 소장품 전시가 아니라 기획전이나 초대전을 열 때도 자기 특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작고한 작가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미술관이 그와 무관한 전시를 자주 열어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한다. 최근 한 기업체가 설립한 미술관은 작가에게 돈을 받고 전시 공간을 대여하는 곳으로 둔갑해버렸다. 이름만 미술관일 뿐이다.

▽미술관 작품 구입의 문제점〓미술관은 설립 취지에 걸맞는 작품을 구입해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명작 감상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한 큐레이터는 “미술관이 갤러리에서 좋은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술관이 작품을 헐값에 요구해 시장 질서를 흐려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지방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마친 한 조각가는 “미술관측에서 1000만원 짜리 작품을 400만원에 팔라고 요구했다. 재료비에도 못미치는 가격이어서 팔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면 명예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팔곤 한다.

▽갤러리의 근시안적 상업주의〓국내 갤러리들은 전시보다 돈되는 작가의 작품에만 눈독을 들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볼만한 기획전이나 초대전을 여는 갤러리는 서울에서 불과 20곳 내외. 한 미술인은 “갤러리들은 미술 시장을 튼실하게 다질 수 있는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며 “마치 곶감 빼먹듯 돈되는 작가의 작품만 빼먹다 보면 얼마 되지 않아 미술 시장은 바닥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작가와 큐레이터 지원 소홀〓세잔을 세계적인 화가로 만들어낸 것은 화상(畵商)이었다. 한국엔 이런 화상이 드물다. 오히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작가의 창의력을 막는 경우까지 있다. 서너곳의 갤러리에 전속된 한 중견 작가는 “작품에 변화를 주고 싶은데 갤러리 측에서 ‘지금대로 그려야 잘 팔리니 바꾸지 말라’고 압력을 넣어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큐레이터를 홀대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특히 갤러리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기획전을 치밀하게 준비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

▽미술관 갤러리의 차별화와 전문화를 위하여〓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전문화 차별화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심상용 동덕여대교수의 조언.

“연구 중심의 미술관과 대중을 위한 미술관, 아동 전문 미술관처럼 차별화된 미술관들이 필요하다. 상업 화랑도 전문 영역으로 차별화를 이루고 퓨전형, 중저가형 등 새로운 대안화랑이 출현해야 한다. 이렇게 다양화 전문화되면 콜렉터층과 작가군이 명확해진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이제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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