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미술현장진단]⑤비평 부재의 한국미술

  • 입력 2002년 9월 22일 18시 44분


《“한국 미술 풍토에서 평론가가 같은 대학 출신의 선배 작가와 평론가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자칫 왕따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 갤러리 대표)

“드문 경우지만 어떤 미술 평론가가 한 작가를 띄워 주는 평론을 책에 쓰곤 그 작가에게 대가를 요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큐레이터)

한국 미술계에 비평이 실종됐다는 지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전시회 팜플렛 서문은 주례사나 다름없고 전문지 등 저널에 실리는 글의 대부분이 전시 해설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미술을 위한 진지한 토론이나 문제 제기도 드물고 작가들은 비판을 외면 또는 무시한다. 》

▽비평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장벽들〓학연 중심의 구조는 비평이 설 자리를 봉쇄한다. 한국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는 특정 소수 대학 출신의 비평가와 작가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 작가는 “한 때 모 대학의 경우, 출신 작가의 첫 전시는 같은 대학 출신 선배 평론가의 글을 받아 서문으로 써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미술평론가인 윤범모 경원대교수는 “평론가들이 선배 동료 작가의 들러리만 서는 형국이니 비평이 발달할 수 없고 비평이 없으니 창작 역시 발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 미술 비평을 소개할 매체가 부족하다는 점, 비평가들의 열악한 위상과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등도 비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현장과 동떨어진 관념적 현학적 비평〓평론가들이 작품을 보지 않고 비평하는 경우가 많다. 전시회 팜플렛 서문이 대표적인 예. 한 큐레이터는 “작품 실물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서문을 쓴다. 평론가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현장을 외면한다. 그러니 주례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작품을 보지 않으니 그 내용은 지극히 관념적이다. 시종일관 원론적인 얘기를 나열하거나 작품과 관계없는 관념적 현학적인 철학 용어를 남발한다.

한 평론가는 “서문은 평론가들이 본격 비평으로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비평의 영역으로 보아선 곤란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한 한 전시 기획자의 비판.

“비평가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작품과 작가는 온데 간데 없고 관념의 늪에 빠져있다. 그렇다보니 서문을 보면 그게 그것이다. 한 작가에게 써준 서문을 다른 작가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다른 평론들도 대동소이하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비평〓한 평론가는 “서구 미술 이론에만 치우치다보니 젊은 비평가 중에는 한국 원로 작가의 이름조차 모르는 이도 있다. 한국의 전통을 무시하고 서양의 현대이론에만 매몰돼 한국 미술사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자성했다.

이론에는 강하지만 현대 미술의 흐름엔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pkm 갤러리의 박경미 대표는 “국내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작업을 한 작가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이들의 작품 및 평론 활동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풍토가 조성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미술 이론에만 갇혀 인문학 등 주변의 관련 학문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기획자인 최금수 네오룩닷컴대표는 “인문학 등 주변 학문을 함께 공부할 때, 비평이 시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했다.

▽비판을 두려워 하는 작가들〓한 갤러리 대표는 “어느 작가는 평론가에게 부탁해 전시 팜플렛 서문을 받았는데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 있자 그 서문을 게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작가들은 비판을 받으면 자신의 작품 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다.

현재 외국에 체류 중인 한 젊은 큐레이터가 국내 원로 작가들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자 미술계는 “그 젊은 친구 제법이군” 정도의 반응만 보일 뿐, 비판 내용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설령 비평이 있어도 발전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 미술의 비평을 위하여〓윤범모교수는 “비평가들이 외부 조건만 탓해선 안된다. 문제는 비평가 작가 모두 비평 정신이 결여됐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작가 한젬마씨는 “작가들은 혹독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진정으로 고독하게 성숙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끝-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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