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60㎝에 대학 동기인 의사 남편과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과 7세 아들을 둔 양 대표. 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한 ‘악바리’에 의학박사(이식면역학)를 따고 삼성서울병원 임상병리학과 전문의 겸 교수로 있다가 단지 안락함이 싫어 사표를 던진 모험가. 1980년대 초반, 서울대 음악동아리 ‘메아리’를 이끌던 ‘꾼’. 게다가 기자는 사장실 책상 위에서 최고경영자(CEO)가 한참 빠져 있는 ‘완치로 가는 길’이란 책을 봤다.
#1.양윤선 vs 안철수
공부 잘해서 서울대 의대에 들어간 것말고도 둘은 닮은 점이 많다. 컴퓨터바이러스의 국내 1인자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대표의 부친은 의사, 양 대표의 부친은 육군 장성으로 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모두 서울대 의대에서 기초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무엇보다 ‘멀쩡히’잘 있다가 벤처 사장으로 변신했다.
안 대표가 양 대표의 대학 3년 선배, 안 대표의 아내 김미경씨(39)는 2년 선배다. 김씨는 특히 삼성서울병원(해부병리학)에서 교수로 함께 일하며 양 대표와 친했다. 양 대표와 안 대표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역시 ‘평범함을 거부했다’는 것일 게다. 양 대표는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는 꿈을 단 한번도(믿기 어렵지만) 바꾼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80년대 또래 학번들이 그랬듯이 운동권 언저리에 있었다. 예과 때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원조격인 서울대 음악동아리 ‘메아리’에서 암울한 시대 상황을 노래했고 본과 때는 ‘메아리’의 아류인 ‘소리’라는 노래서클을 만들어 활동했다.
“성격이겠죠. 워낙 호기심이 많은데다 직접 해 봐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이 궁금했어요. 갈등도 많았지만 같은 서클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수준의 이념적 무장을 갖고 고민하는 건 아니잖아요.”
여담이지만 그는 최근 ‘거북이’라는 가수가 랩과 힙합 사운드를 가미해 리바이벌한 노래 ‘사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매우 ‘거북’해요. 멜로디는 어울리게 편곡한 것 같은데 가사를 매치해 들으면 소름이 끼쳐요.”
전기생리학을 전공한 안 대표는 의학박사 학위를 따고 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영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양 대표는 의대 수석 졸업생으로는 이례적으로 내과나 산부인과가 아닌 임상병리과를 선택했다.
“인턴을 하면서 의술로 고칠 수 있는 질병이 한정돼 있다는 걸 깨달았죠. 외과적인 수술로 떼어내는 치료법말고는 완치가 어렵다는 것도 알았고요.”
대답이 부족했다고 느꼈던지 이내 솔직한 고백이 이어진다. “환자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걸 회피한 거죠. 불쌍하고 어려운 환자를 보면 괴로운데, 제가 너무 감정이입이 잘되는 성격이거든요. 자꾸 봐도 무뎌지지 않고, 그래서 급선회한 거죠.”
#2.안락함을 벗어던지다
서울대병원에서 4년간의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에게 개원 멤버를 모집하던 삼성서울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는 전공의 시험에서도 전국 1등을 했다.
6년간의 삼성서울병원 생활. 그러나 약속했던 ‘전폭적인 지원’도 외환위기가 터지고 의약분업이 되면서 줄었다. 삼성의 독특한 기업문화가 병원 경영에 투영되면서 처음에 가졌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샐러리맨으로 순응하며 사는 데 대한 실망도 컸다.
“치열한 경쟁이 없는 시스템이었어요. 미국만 해도 교수가 되면 중간평가가 철저하게 이뤄지고 성과에 따라 좋은 대우를 받죠. 우리는 한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안주해요. 교수가 되면 쫓겨날 일이 없는 거예요. 중간에 서울대에서 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삼성에서 못한 일을 서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삼성서울병원은 1998년 국내 최초로 제대혈 은행의 셋업에 들어갔고 그는 준비 멤버로 2년간 제대혈 은행을 운영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 준비에 나섰다. 제대혈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로 세포치료제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의사 5명이 사업계획을 세우고 MBA로 현 메디포스트의 공동대표인 진창현 사장(37)을 영입했다. 기초 설비자금 마련이 급했다. 자본금 전액을 투자하겠다는 제약회사도 있었지만 의사들이 33%를 내고 개인 투자자를 모집해 자본금 13억5000만원에 회사를 차렸다. 그게 2000년 9월.
그는 연구만 맡고 진 사장에게 영업과 마케팅과 재무 등 경영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구원 6명에 상근직 의사가 2명 뿐인 벤처기업에서 분업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초창기에 병원을 상대로 영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의사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제가 맡을 수밖에 없더군요. 전국 산부인과를 돌며 제대혈 프로그램을 알리고 기업전략을 짜야 했어요.”
매출이 오르기 전까지는 ‘펀딩’으로 꾸려가야 하는데 찾아가는 창투사마다 고개를 돌렸다. ‘바이오벤처는 수익모델이 없다’ ‘누가 몇백만원을 내고 탯줄을 맡기겠느냐’는 말이 돌아서는 양 대표의 등뒤에 흘러내렸다. 각개전투. 개별 격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소문을 냈다.
2002년 9월. 런칭 당시보다 매출은 60배가 늘었고 월 매출액은 20억원으로 뛰었다. 직원도 40여명으로 늘었고 올해 매출 목표도 100억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됐다.
#3. 꿈★은…
포부 얘기가 나오자 그는 엉뚱하게도(?) 한국 바이오산업의 현실과 문제점을 거침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술만 있는 박사나 교수의 창업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과 어떤 한국의 투자 기업도 3∼4년 이상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 직원의 80%가 연구인력으로 구성된 미국식의 바이오벤처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설명도 덤으로 붙였다.
“국제 바이오 엑스포에 가보면 대학연구소나 병원들도 부스를 설치하고 기술을 선전해요. 여건도 안 맞고 사업성도 평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적인 실험실 창업은 무모해요. 차라리 자본이 있는 병원이나 기관이 좋은 기술을 사들이고 사업화를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계면쩍은 미소로 어물쩍 넘겼던 꿈에 대한 대답은 인터뷰가 끝난 이튿날 e메일로 정리가 되어 날아왔다. 처음에는 줄기세포 치료제를 기업화해서 개발해 보자는 단순한 목표밖에 없었다는 얘기부터, 이제는 번 돈으로 신나게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생겼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승호 얘기가 있었다. 백혈병에 걸렸지만 맞는 골수가 없어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다 여동생의 제대혈에서 추출한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아 생명을 건진 아홉살배기 소년의 얘기였다.
▼제대혈 Q&A▼
-제대혈이란?
“분만 후 어머니와 태아를 연결하는 탯줄에서 채취되는 혈액입니다. 그 속에는 골수와 마찬가지로 혈액을 새로 만들어 내는 조혈모세포가 있고 연골, 뼈, 근육, 신경을 만드는 간엽줄기세포도 있습니다.”
-줄기세포는?
“원시세포로 이것이 수백개의 세포로 분화돼 우리 몸을 이루는 장기와 조직이 됩니다. 수정란에서 얻을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와 골수, 제대혈에서 얻을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습니다.”
-제대혈 은행이란?
“분만 후 채취된 탯줄 혈액에서 조혈모세포를 분리해 보관했다가 이식이 필요할 때 공급하는 곳입니다. 제대혈을 기증받아 환자에게 공급하는 공여 은행과 아기와 가족만을 위해 보관해 주는 가족은행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제대혈은 어떤 질환에 사용되나?
“기본적으로 골수 이식 수술이 필요한 백혈병이나 다양한 암, 악성혈액질환, 선천성 대사장애, 면역장애 질환의 치료에 쓰입니다.”
-제대혈은 어떻게 보관하나?
“채취한 뒤 24시간 이내에 제대혈 은행으로 운반돼 검사 후 여러 단계의 처리 과정을 거쳐 조혈모세포를 분리하고 영하 196도의 질소 탱크에 냉동 보관합니다.”
-누가 보관하나?
“영구 보관이 가능하지만 제대혈 은행별로 15년 정도를 기본 계약기간으로 하고 비용은 일시불로 130만∼150만원 수준입니다”
-제대혈 보관 은행은 몇 곳이 있나.
“국내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메디포스트가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라이프코드, 히스토스템 등이 있습니다. 1988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제대혈 이식이 이루어졌고 1995년부터 미국 유럽 일본을 중심으로 3000여건 이상이 시술됐습니다.”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