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2002·가을·맨해튼 '패션피플'의 라이프 스타일

  • 입력 2002년 9월 26일 17시 27분



《뉴욕은 여전히 세계 유행의 1번지인가. 18일부터 6일간 계속된 '2003년 봄 뉴욕 패션 위크' 기간동안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머천다이저 등 을 만났다. 전대미문의 테러 충격과 경기침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의 유행을 창조하는 패션계 사람들은 "세련되고 세속적(sophisticated)이며 철저히 개성존중, 개인주의(individualism)인 뉴요커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유행의 산파역할을 하는 맨해튼 '패션 피플'들의 하루와 이들이 감지하는 유행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

●맨해튼의 하루

“헬로, 존 뎀시입니다. 이전에 얘기했던 영국 디자이너 ‘루엘라 바틀리’ 이벤트는 잘 마무리됐습니다. 5번가의 헨리 벤들 백화점에서 열렸어요.”

23일 오전 9시10분. 화장품회사 ‘맥(M.A.C)’의 존 뎀시 사장(46)은 사무실로 향하는 옐로캡(택시)안에서 휴대전화로 유럽 지사장들과 통화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뎀시 사장은 자가용을 두고 매일 아침 택시로 출근한다. 맨해튼의 교통정체나 주차난은 1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파크애비뉴 57번가의 집 앞에서 소호지역인 프린스거리의 사무실까지는 꼭 20분이 걸린다.

뎀시 사장의 아파트가 있는 파크애비뉴는 맨해튼의 대표적인 부촌. 마돈나 같은 대중스타부터 정부 고위관리들까지 이곳에 집을 갖고 있는 명사들이 많다. 그의 기상시간은 오전 6시45분. 일어나자마자 기계적으로 56번가의 ‘미드타운 피트니스’로 향한다. 일주일에 다섯 번씩, 전담 강사로부터 전문적인 지도를 받는다.

아침식사는 집 근처의 빵집 ‘만조’에서 구입한 통밀 베이글 하나와 묽은 아메리칸 커피 한잔으로 마친다. ‘잘 나가는’ 동네일수록 재래식 화덕에서 구워내며 단골만을 상대하는 소규모의 고급 베이커리가 인기다.

점심은 주로 신문사나 잡지사의 에디터들과 함께 한다. 뉴욕대(NYU)에서 MBA를 취득한 뒤 ‘블루밍데일’ ‘삭스 피프스 애비뉴’ 같은 백화점과 ‘레블론’ 등에서 20여년간 바이어, 세일즈매니저, 사장 등을 두루 거쳤기 때문에 웬만한 패션계 인사들과는 허물없는 사이다.

뉴요커들은 상대방의 경제,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으로 ‘어느 레스토랑을 다니느냐’를 꼽는다. 레스토랑의 트렌드를 이끄는 상류층 뉴요커들의 신념은 두 가지. 첫째, 뉴욕타임스 등 언론매체에 소개된 곳은 이미 ‘끝물’이다. 둘째, 지배인과 안면이 없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라. 입소문을 타고 ‘일반인’도 찾아오기 시작하는 시점쯤 되면 손을 털고 새로운 아지트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요즘 뎀시 사장이 즐겨 찾는 레스토랑은 다운타운의 이탈리아 식당 ‘다 실바나’. ‘미스터 차우’ 같은 동양음식전문점도 좋아한다.

뎀시 사장은 “뉴욕에서 화려한 나이트 클럽이나 그만그만한 바들의 시대는 끝났다. 대신 ‘유러피언 라운지’가 인기”라고 말했다. ‘유러피언 라운지’는 실내 전체에 테이블과 의자를 빽빽하게 배치하는 대신 나지막한 의자를 한쪽 벽으로 몰아놓고 남은 공간에 작은 테이블을 띄엄띄엄 세워놓아 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한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차분하고 단란하다. 그는 뉴욕대 인근 10번가에 있는 ‘텐스바’와 유니언스퀘어 근처 16번가 동쪽의 ‘언더바’에 자주 들른다.

뉴욕 남자들은 근래 부쩍 양복을 즐겨 입는다. “이 도시는 점점 더 진지해지고 부르주아화 하고 있다”고 뎀시 사장은 진단한다. 질 샌더, 헬뮤트 랑, 에르메스 등 유럽 명품 브랜드에도 지루해지기 시작한 멋쟁이들은 미국에 수입되지 않는 다른 명품 브랜드나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영국 런던 셰빌로가의 맞춤 양복을 찾기도 한다. 여성들도 고급 보석에 점점 더 관심을 보인다.

요즘 뎀시 사장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세계 평화’다. 지난해 9월 11일 아침, 그는 소호에 있는 사무실 2층에서 테러범들이 탄 두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로 날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날 그는 친구등 가까운 사람 6명을 잃었다. 표면적인 일상은 그대로이지만 뎀시 사장은 “평생 절대로 그 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래선지 5년후 뉴욕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밝지만은 않다.

“‘와일더(wilder) 라이프’. 직장을 유지하는 일이나 뉴욕시가 요구하는 수준의 생활비를 버는 게 더 힘들어질 겁니다.”

●뉴요커, 세련과 속물사이

맨해튼의 땅밑을 달리는 지하철들이 일제히 만나는 지점인 맨해튼의 심장부, 타임스 스퀘어 인근. 어지럽게 번쩍이는 광고 전광판과 총총걸음의 뉴요커들이 현란하고 분주한 뉴욕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동아일보 자료사진

18일 오전 8시. 잡화 브랜드 ‘나인웨스트’의 아시아지역 유통회사인 ‘GRI’의 부사장이자 머천다이저 린다 시걸(여)이 미국 맨해튼 서쪽 92번가의 한 콘도미니엄을 나섰다.

9월 중순이지만 맨해튼은 아침 기온 15도, 한낮 기온 24도를 웃도는 인디언 서머. 날씨가 선선하면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첼시지역인 서쪽 20번가의 회사까지 걸어다닌다.

“1시간 30분이나 걸리지만 아침 공기가 좋고 걷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죠.”

시걸 부사장은 이날 검은색 ‘시어리’재킷에 역시 검은색의 ‘바나나 리퍼블릭’ 팬츠를 곁들여 전형적인 뉴요커룩이었다. 홍콩에서 구입한 에스닉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무광택의 은색 티파니 팔찌나 굽이 낮은 나인웨스트 검은색 단화까지 미니멀리즘의 극치다. 자신처럼 여전히 검은색을 고집하는 뉴요커들이 많지만 요즘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옷차림에는 부쩍 브라운 톤이 늘어난 것 같다고 느낀다.

기본적인 옷들은 집 근처의 바나나 리퍼블릭이나 클럽 모나코에서 구입하고 고급 의상은 메디슨 애비뉴의 백화점 ‘바니스’에서 쇼핑한다. 구두는 5번가의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7층 매장에서 산다. 프라다나 구치의 로퍼가 편해서 좋다.

“명품이라는 로고 자체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제 마음에 맞는 디자인에 품질도 좋다면 브랜드는 상관없어요.”

화장은 공들이지 않은 듯 간단하게 한다. 여름까지 회색과 검은색으로 눈 주위를 강조하는 ‘스모키 룩’이 두드러졌지만 가을이 되면서 다시 내추럴한 화장이 인기다. 최근 뉴욕의 젊은 여성들은 ‘나스(Nars)’, ‘바비브라운’, ‘소냐 카슈크(Sonya Kashuk)’ 등의 브랜드를 색조 화장품으로 즐겨 사용한다.

잡지사에서 안젤리나 졸리, 캐롤린 터너 등 여배우와 모델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 사비나 커즈(여·31)는 ‘유행의 거리’로 여전히 소호(Soho)를 꼽았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면서 명품숍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소호 구석구석에는 뉴욕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아기자기한 숍들이 많다는 것이다.

“소호와 리틀 이탈리아 근처의 작은 부티크나 빈티지숍을 둘러보면 금세 요즘 유행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어요.”

비비안 웨스트우드, 불가리, 피아제, 파코라반, ‘Y&Kei’등의 홍보를 대행하는 ‘피플스 레볼루션’의 켈리 코트론 사장(여·36)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서 가까운 소호의 앤티크 스토어 ‘앤트로팔러지스’를 찾는다. 아시아 각국의 전통 다기(茶器)나 식기에서 영향을 받은 에스닉한 인테리어 소품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아한다.

직업상 최고급 디자이너 브랜드 의상을 입기도 하지만 월드트레이드센터의 피폭지점인 ‘그라운드 제로’ 근처의 명품 재고분 할인점 ‘센추리 21’이나 허름한 빈티지 스토어도 즐겨 찾는다. 하지만 4개월반 된 딸 에바에게는 티셔츠 한 장에 100달러가 넘는 프랑스제 ‘부&덕’등 최고급 아동복 사주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은 뉴욕에 사는 장점을 묻자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사무실을 자랑했다.

“리처드 마이어가 디자인한 빌딩이죠.” 마이어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장식 미술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 뉴욕의 상류층에게는 여전히 졸부적 씀씀이보다는 어떤 건축가가 디자인한 집에서 살며 어떤 가치있는 앤티크를 가지고 있는지 등의 ‘세련된 취향’이 삶의 질의 평가 척도로 쓰인다. 클라인은 “내 요즘 최대 관심사는 세계화다. 세계 각국 사람들의 취향이 통일돼 나타나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 ‘세계화된 패션’의 창조자인 캘빈 클라인에게 ‘뉴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뉴욕 출신이며 뉴욕을 사랑합니다. 내게 있어서 뉴욕은 세상의 전부입니다.”

●아름답고 건강하고 사랑받고 싶다

패션 브랜드 ‘케네스콜’의 홍보책임자 체리시 맥시어(33·여)는 3개월 전 맨해튼의 전통적인 부촌인 어퍼 이스트사이드에서 소호와도 가깝고 트렌드에도 민감한 허드슨 거리로 이사했다. 최근 고소득의 젊은 미혼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는 맥시어씨처럼 부촌(富村)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동네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이를 기르는 맥시어씨의 두 여동생은 안전하고 깨끗한 롱아일랜드에, 은퇴 후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부모님은 뉴욕시 북쪽의 시골로 이사했다.

맥시어씨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피부다. 미국에서 판매되지 않아 런던이나 그리스에 있는 친구들에게 부탁해 공수해오는 ‘니베아 선스크린’을 매일 아침 바르지 않으면 마음이 찜찜할 정도다. 뉴욕에서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보다 많은 브랜드들을 접할 수 있지만 맥시어씨처럼 여기서도 구할 수 없는 제품을 굳이 구해다 쓰는 여성들이 많다.

최근 맨해튼 전역에 ‘스파’라는 간판을 단 피부 관리실이 부쩍 늘고 있는 것도 트렌드다.

“저는 바빠서 들러보지 못했지만 친구들은 엘리자베스 아덴, 에이치투오, 블리스, 헬레나 루빈스타인 등 화장품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스파에 자주 다녀요.”

이런 ‘스파’에는 사우나나 목욕 시설이 딸려있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꼼꼼하게 피부관리와 마사지를 해준다. 톱 모델 이만, 아이슬란드 출신 가수 비요르크가 찾는 리틀이탈리아 거리의 모자 숍 ‘켈리 크리스티’의 디자이너 켈리 크리스티(여·42)는 한 시간 반 수업에 수강료 20달러를 내는 요가 클래스에 심취해 있다.

“뉴욕에서의 요가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아요. 뉴요커들이 정신문화를 추구하는 것에 점점 더 심취해 가니까요.” 특히 노호(Noho)와 리틀이탈리아 사이 라파예트거리에 있는 ‘지바몽티’가 유명하다.

크리스티씨는 하지만 최근 스스로의 영혼을 돌보는 일보다 함께 영혼을 보듬어줄 사람을 찾는 일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했다.

“맨해튼에는 독신 남녀가 많지요. ‘작업’이 가능한(available) 남성들은 많지 않지만 이제 많은 독신 여성들이 결혼을 원하고 있어요. 저도 이제 둘이 될 준비가 됐어요.”

뉴욕=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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