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유홍준 교수가 본 ‘청전展’, 20세기 한국화 대표화가

  • 입력 2002년 9월 26일 18시 28분


청전 이상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1960년대작 ‘산가청류’(63×129㎝).
청전 이상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1960년대작 ‘산가청류’(63×129㎝).
《‘청전 이상범의 진경산수’전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청전의 50여년 작품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 전시는 10월 6일까지 계속된다. 미술평론가 유홍준 명지대 교수(사진)가 청전의 작품 세계와 한국 화단에서의 그의 위상, 이번 전시의 의미를 분석했다. 한편 갤러리현대는 29일 오전 11시엔 ‘한국화가 임태규와 함께 산수화 그리기’ 행사도 마련한다. 02-734-6111∼3》

얼마전까지만 해도 청전(靑田) 이상범의 작품을 평한다는 것은 현장 비평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청전 30주기를 기념하는 이번 전시를 나는 완전히 미술사가의 위치에서 보고 있었다. 그것은 사후 3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의 거리 때문이라기보다 한 시대 획을 긋는 고전의 만남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청전이 추구한 예술 세계는 아주 간명한 것이었다. 서양화의 도입으로 시작된 근대미술사에서 한국화 제1세대의 화가들은 어떻게 전통을 이어가고 또 어떻게 전통을 개조하며 현대성을 획득하는가를 고민했다. 그것은 청전과 일생을 같이한 이른바 동양화 10대가 또는 동양화 6대가 모두가 운명적으로 짊어진 예술적 과제였던 것이다.

그 시대적 소명에 가장 훌륭하게 답한 것은 역시 청전이었다. 이번 전시는 그 점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청전은 늘 냇물이 여울져 흐르는 야트막한 야산에 살고 있는 촌부의 모습을 담는 것에 그의 예술적 승부를 걸었다. 허름한 농가 몇 채, 거기로 향하는 물동이를 인 아낙네, 소를 몰고 가는 농부, 나뭇짐을 질어진 초부 그리고 키 큰 마른나무 몇 그루 그것이 전부이다.

그 단순하고 단조로운 소재를 아주 간결한 구도로 그려냈지만 청전의 그림은 항시 조촐한 우리네 시정과 욕심없이 살아가는 해맑은 정서의 환기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청전 작품에서는 고고한 한국적 서정성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개막일 나는 한 중년 여인이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가 귀에 번쩍 들렸다.

“청전은 시골풍경을 그렸는데도 그림에 시골티가 없고 오히려 고결한 귀족적인 분위기가 있네요.”

청전의 비결은 사실 필법(筆法)에 있었다. 그의 필치는 대단히 현대적이고 거칠고 까실까실하다. 필치 자체만은 앵포르멜(informel)적이다. 모든 역사상 명화는 시대를 넘는 필치의 현대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청전에게서도 보고 있는 것이다.

청전의 작품을 몇 차례 보면서 나는 미술사적 의미를 여러 모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에 뉴욕의 모던아트 뮤지엄이나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할 20세기 우리 미술의 대표 선수를 고른다면 누가 될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한국화에서 청전, 양화에서 박수근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는 청전에게 그저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올리고만 싶다. 청전이 없었다면 20세기 한국화는 얼마나 허전했을까.

그런 청전이지만 당신은 살아 생전엔 제대로 된 개인전 한 번 못 열어보았고, 사후 30년이 되도록 이제 겨우 4번째 회고전이고 보니 우리는 이 대가의 위업과 노고에 대해 너무도 소홀히 대접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언제 또다시 이런 회고전을 열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는 쓸쓸한 생각이 일어 고인에게 더욱 미안스럽기만 했다.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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