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스님의 산사이야기⑬]고무신 때 닦으며 번뇌도 씻어내

  • 입력 2002년 9월 27일 18시 10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스님들의 하얀 고무신.사진제공 현진스님
가지런히 놓여 있는 스님들의 하얀 고무신.사진제공 현진스님
어느 스님이 그랬다. 자신의 중 노릇은 고무신 닦으며 보낸 세월이었다고.

장난스러운 말 같지만 맞는 말이다. 고무신 닦는 일을 마음 다스리는 수행으로 그 뜻을 바꾸어보면 정말 공감이 간다. 나 또한 머리 깎고 고무신 닦으며 살아온 세월을 헤아려 보니 어느새 15년이 훌쩍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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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에게 어울리는 신발이 군화이듯 스님들에게는 고무신이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하얀 고무신이면 더 적격이다. 고무신은 검약과 무소유의 상징이다. 그런 까닭에 출가하는 절차 가운데 가장 먼저 하는 의식은 그동안 신었던 신발을 벗고 새 고무신을 신는 일이다. 이제는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뜻이다. 고무신 한 켤레에 만족한 삶을 산다면 그 누가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겠는가.

검정 고무신에 견주어 하얀 고무신은 씻으면 금새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어쩌다 흙투성이가 되어도 비누칠만 하면 새것처럼 윤이 난다. 더러운 때를 씻어내기만 하면 고무신은 처음처럼 하얗고 깨끗하다. 마치 우리의 성품 같다. 고무신이 스스로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오물이 고무신을 더럽힌 것과 같이 우리의 본래 성품은 그대로인데 번뇌와 망상이 마음을 어둡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마음 다스리는 수행이란 어려운 게 아니다. 애써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본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이는 약을 쓰는 일보다 건강한 몸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것과 같다. 깨달음 역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성품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벗어 놓은 고무신을 눈여겨보면 재미있는 표시들이 많다. 신발이 뒤바꾸지 않게 하기 위해 신발 코에 주인들이 나름의 표시를 해 놓았는데 암호들이 무척 다양하다. 꽃이나 별을 그려 놓기도 하고 무늬나 부호를 붙였는가 하면 추상적인 문자도 있다. 간혹 유명 메이커인 ‘나이키’ 상표를 그려서 ‘조선 나이키’라고 표시해 놓은 장난기 가득한 스님의 고무신도 눈에 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부호나 표시가 중복되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는 말처럼 100사람이면 100가지의 암호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인은 똑 같은 고무신이 한곳에 모여 있어도 자신의 신발을 용케 알아보고 골라 신는다.

신발 하나에도 이렇듯 다양한 개성들이 드러나는 셈이다. 우리 삶에서도 그러하겠지만 획일화된 수행방식은 너무 밋밋하고 싱겁다. 무슨 일이든 모방과 기성의 틀에 갇히면 새로운 가치창조를 방해받기 마련이다. 한가락에 떨면서도 따로 따로 소리를 내는 거문고처럼, 서로 공유(共有)하면서 자기 세계를 가꿀 줄 알아야 모나지 않는 자기 개성의 표현일 것이다.

해안사 포교국장 budda122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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