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을 출발해 한적한 가회동 주택가로 들어서자 버스의 중간 좌석 쯤에서 엄마와 딸의 노래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엄마, 지금 어디 가?” “미술관에 그림 보러 가는 길이지.”
버스가 청와대 앞길로 접어들었다. 광화문 앞 대로에서 1㎞도 안떨어진 곳인데도 도시의 소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청와대 안으로 가을 햇살 아래 부지런히 빗질을 하는 환경미화원의 모습이 보인다. 담 바깥으로는 군데 군데 서 있는 군인들과 경호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봤다.
“저 아저씨들은 왜 저렇게 서 있어?” “여기는 대통령 할아버지가 사는 집이거든. 그래서 저렇게 지키는 거야.”
지난달 29일. 비가 갠 뒤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 일요일 오후. 미술관이 모여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과 평창동을 오가는 미술관 순회버스 안은 한가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림도 보고
도심 한 복판인 인사동에만 50여 곳의 화랑이 있지만 그림을 감상하러 화랑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젠가 꼭 미술 감상을 제대로 해 봐야지’ 하면서도 어디서 무슨 작품을 보는게 좋을 지 몰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면 미술관 순회버스를 한 번 타 보자.
버스가 데려다 주는 미술관은 인사동, 평창동 일대의 10여 군데. 모두 비중 있는 근현대 미술 작품의 기획 전시회를 수시로 갖는 유명 화랑들이다. 이 화랑들의 전시회만 정기적으로 쫓아다녀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주요 근현대 작품들을 웬만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가족과 함께 가나아트센터에 들른 손상범씨(35)는 “아내에게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보기 시작했는데 2년 정도 좋은 작품들을 계속 보다 보니까 조금씩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미술관 순회 버스가 다니는 길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도 포함돼 있어 고(古)미술과 전통 생활을 체험할 수도 있다.
●드라이브도 하고 산책도 즐기고
순회버스가 지나가는 길은 다소 짧다는 점이 아쉽긴 해도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우선 지나다닐 기회가 많지 않은 청와대 앞길을 지나간다. 승용차보다 높은 버스 좌석에 앉으면 눈높이의 담장 너머로 일부분이나마 청와대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청와대를 지나면 버스는 환기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창의문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는 빨간색 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집들이, 오른쪽으로는 북악산 줄기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4년째 순회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김정웅씨(59)는 “가을에는 낙엽을 보려고 버스를 타는 40대 여성들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응노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산책로로 안성맞춤이다. 천천히 걸으면 20분 가량 걸리는 거리. 차도, 사람도 뜸해 한적한 골목을 걷노라면 주변 풍경이 자세히 눈에 들어온다. 고급 주택가인 이 곳의 모양이 제각각인 집들이 인상적이다. 집들 위쪽으로는 북한산 봉우리들이 지척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서는 탁 트인 시야속에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이 보인다.
갤러리현대가 있는 사간동에서 경복궁 돌담을 따라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길도 산책하기에 좋은 곳.
●어디서 어떻게 타나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오후 1시를 첫 차로 오후 5시까지 매 정시에 버스가 출발한다. 그 다음 목적지인 아트선재센터에는 매시간 5분에 도착하며 국제갤러리(6분), 환기미술관(10분)을 거쳐 25분에 가나아트센터에 도착한다. 돌아올 때는 가나아트센터에서 30분에 출발해 환기미술관(45분), 국제갤러리(55분)를 지나 곧바로 인사아트센터에 닿는다. 30인승이며 요금은 1000원.
김정웅씨가 권하는 버스 이용 요령은 이렇다. 요즘처럼 환기미술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없을 때는 일단 인사아트센터에서 출발해 도중에 내리지 않고 가나아트센터까지 드라이브를 즐긴다. 평창동 일대의 미술관을 여유있게 둘러본 뒤 돌아오는 길에 국제갤러리 앞에서 내려 사간동과 소격동 일대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한다.
김씨는 “평창동을 마지막 코스로 택하면 막차 시간에 맞추느라 제대로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버스 문의 인사아트센터 02-736-1020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미술관 옆 맛집▼
서울 인사동, 삼청동 일대에는 개성이 독특한 맛집들이 많다. 미술관을 돌아보느라 지친 다리를 쉬며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길 만한 음식점을 쿠켄네트(www.cookand.net)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 쿠켄네트 마케팅팀의 서원예씨는 “미술관을 돌아본 뒤에 하는 저녁 식사라는 점을 감안해 좀 색다르고 운치 있는 곳들 위주로 골라봤다”고 설명했다. 전화 지역번호는 02.
●인사동
신일(739-5548)〓밥상이 화려하지 않은 한식집. 해묵은 장맛을 이용해 향수를 자아내는 반찬들을 내놓는다.
기미방(720-2417)〓인사동에 ‘약초 아저씨’로 알려진 최진규씨가 차린 식당.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고 식물에서 추출한 즙으로 간을 맞춘다.
조금(725-8400)〓일본식 솥밥으로 유명한 곳. 박달나무 뚜껑으로 덮여 나오는 솥밥에는 새우 굴 등 해물에 어묵 죽순 버섯 등 야채까지 36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벨라로사〓인사동에서 보기 드문 이탈리아 식당. 광화문 ‘뽐모도르’의 주방팀이 새로 차린 곳이다.
●삼청동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734-5302)〓단팥죽이 맛있기로 유명한 집. 수정과나 십전대보탕 같은 한식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뺑앤빵(722-5930)〓솜씨 좋은 요리사 자매가 깔끔한 이탈리아의 맛을 선보이는 뺑앤빵의 삼청 분점.
콩두(722-0272)〓모든 음식에 콩을 넣는 독특한 컨셉트의 퓨전 레스토랑. 스테이크가 유명하며 와인바도 분위기 있다.
다락정(725-1697)〓평양식 만두와 담백한 비지찌개가 일품인 곳. 특히 된장을 푼 국물에 끓이는 토장 만두 전골이 인기다.
큰기와집(722-9024)〓분위기 뿐만 아니라 음식 맛도 가정식인 한정식 전문점. 대추 밤 마늘 등을 곁들인 간장 게장이 인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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