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수리 기술을 배우면 먹고 살 수 있고 군대에도 안 끌려간다고 해서 일본인에게 매를 맞아가며 5개월 정도 배웠지. 펑크 때우기, 타이어 갈기, 각종 부속품 갈기, 용접….”
그는 만만해 보여도 자전거 고치는 데 100여가지 기술이 사용된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특히 그는 용접 실력만큼은 국내에서 최고라고 자부한다.
“20년 전에는 부산의 한 주물공장에서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 구멍이 났는데 용접 기술자들이 때우지 못해 결국 나를 불렀어. 비행기표까지 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려가 실력 발휘를 했지.”
1953년 군에서 제대한 그는 고향인 군산에서 자전거포를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이 없어 망했다. 그 뒤 자전거가 많다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1959년 가을 바로 지금 이곳에서 그의 자전거 인생이 시작됐다. 골목 길거리에 앉아 연장통 하나 들고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자전거를 고쳤다. 그의 실력이 소문나면서 손님도 늘고 돈도 좀 모이기 시작했다. 아내 조정애(趙貞愛·70)씨는 보조 역할을 했다. 2년 뒤 지금 가게가 있는 땅 12평을 샀다.
“자전거 수리의 전성기는 50, 60년대야. 특히 6·25전쟁 직후에는 오토바이도 거의 없어 자전거가 지금의 자동차보다 더 귀했지. 또 고장은 얼마나 잦은지 손이 모자랄 정도였어. 아무리 망가져도 버리지 않고 수십 번씩 고쳐 탔으니까. 중고자전거는 없어서 못 팔았고….”
70년대 들어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자동차 시대가 열리면서 자전거 수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 동네에 서너 개씩 있던 자전거포는 문을 닫았고 대신 오토바이점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자전거 수리를 끝까지 고집했다.
“요즘 사람들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 펑크만 때우면 멀쩡한 새 자전거를 그냥 버려. 중고자전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10만원씩 하는 새 자전거만 고집하지.”
그에게는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15년 전부터 앓아오던 당뇨에 합병증까지 겹쳐 펑크 때우기만 해도 팔목이 쑤시고 다리가 아파 자전거 수리를 그만 둬야 할 형편이다.
“내가 죽으면 단골 손님들은 어디 가서 자전거를 고치지….”
이호갑기자 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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