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빠에게 또 잔소리를 들었다. “너보다 더 예쁜 애들도 많은데 네가 어떻게 연예인이 된다고 그러냐”며 매번 똑같은 핀잔을 늘어놓는 오빠. 대학 1학년밖에 안됐으면서 생각하는 건 꼭 노인같다. 엄마, 아빠도 안그러는데.
어제는 화가 나서 “오빠 인생이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쏘아부쳤다. 친구들도 가끔은 오빠와 비슷한 얘기를 한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연예계의 화려한 모습에 반해 막연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의사나 변호사를 희망하는 것만 현실적인 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내 꿈은 배우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되고 싶다는 게 절대 아니다. 스타가 되는 것은 의사, 변호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구정고 1학년 심윤희양(16). 오후 4시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의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과외의 종류가 다르다. 친구들이 가는 곳은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보습 학원, 심양이 가는 곳은 노래와 연기, 춤을 가르치는 연예 학원. 최근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근처에 문을 연 ‘아이기스 아티스트 아카데미’라는 곳이다. 이 곳 댄스 연습실에서 심양을 만나던 날, 연습실에 있던 수강생은 심양과 비슷한 또래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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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혹은 현실
지난해 노동부 산하 중앙고용정보관리소가 실시한 서울 중고생의 희망 직업 조사에서 연예인은 3위를 차지했다. 이에 반해 역시 지난해 한 인터넷 포털이 학부모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녀의 장래 직업을 ‘연예인’으로 꼽은 비율은 4%로 최하위권이었다.
심양과 함께 춤 연습을 하고있던 친구들은 ‘환상’에 젖어있는 철없는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심양은 “막연하게 동경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직업의 하나로서 연예계 진출을 진지한 자세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친구들이 상당수”라고 말한다. 심양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방과 후 아이기스에서 ‘과외 수업’에 임하는 태도에는 그런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4시반경 아이기스에 도착하면 수업이 시작되는 6시까지 개인 연습실에서 혼자 전날 배운 동작을 반복한다. 6시부터 3시간 동안은 강사의 지도 아래 새로운 동작을 배운다. 팔을 좌우로 뻗고, 앞 뒤로 스텝을 내딛고, 턴을 하는 단순한 동작이 수없이 반복되지만 지겹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강습을 만족스럽게 소화하지 못한 날은 돌아가는 강사를 붙잡고 추가로 개인 강습을 요청하기도 한다. 강사 홍영주씨는 “막연하게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들은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해 한 달도 안돼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몇 달씩 불평 없이 훈련을 소화해내는 아이들은 그만큼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심양의 꿈은 드라마 ‘피아노’에서 건달역을 잘 소화했던 조재현처럼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가 되는 것. 춤은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기초 과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6개월 정도 춤을 배운 다음에는 연기 과정에 등록할 생각이다.
심양은 “1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보면 ‘스타’가 돼있을 것 같지는 않다”면서 “심윤희라는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알려지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라고 목표치를 밝혔다.
●또다른 현실도 알고 있는 아이들
심양은 저녁 10시가 조금 넘어 집에 도착하면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때로는 새벽 3시까지 학과 공부에 몰두한다. 반복되는 춤 연습으로 힘이 들지만 수업시간에도 졸지 않으려고 애쓴다. 2학년이 되면 아이기스에서 받는 과외를 절반으로 줄이고 보습 학원에 다니겠다고 부모님과 약속을 했다.
심양은 대학도 꼭 연극영화과로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는 희망 전공은 건축. 심양은 “우선은 연기쪽에 승부를 걸어볼 생각이지만 그게 잘 안될 경우도 대비를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심양의 학과 성적은 중위권.
아이기스의 다른 수강생들 생각도 비슷했다. 김빛나군(17)은 장래 희망이 수의사라고 밝혔다. 김군은 “남자는 군대 문제도 있고 해서 춤으로 인생의 승부를 걸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언주중학교를 다니는 보컬반의 이정은양(14)은 일주일에 사흘은 보습 학원에서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운다.
아이기스에서 보컬반을 맡고 있는 그룹 ‘노이즈’ 출신의 천성일씨(35)는 수강생들에게 “연예인으로 성공하는 것은 공부로 출세하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 학교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어린 수강생들을 향한 그의 충고는 살벌할 만큼 현실적이다.
“연예인은 경쟁을 견디지 못하면 대번에 버려지는 상품이다. 히트하지 못하면 음반 한 장 내고 그것으로 끝이다.”
●눈높이를 맞추는 부모들
자녀의 장래 직업을 연예인으로 꼽은 부모가 4%에 불과한 현실에서 심윤희양과 이정은양의 부모처럼 매달 30만원씩의 레슨비를 내면서까지 춤과 노래 연습을 시키는 기성세대는 어떤 사람들일까.
아이기스의 이경민 공동대표(35)는 “청소년 수강생들은 대부분 부모와 함께 와서 등록을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꼭 공부만 고집할게 아니라 아이들이 정말 하고 싶어하는 분야를 밀어주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밝힌다는 것. 연기나 춤을 배우는 학원이 피아노 미술학원과 다를 게 무엇 있겠느냐는 것이 요즘 학부모들의 반응이다.
개인 사업을 하는 이정은양의 부모도 이런 부류. 이양의 어머니 조지미씨(44)는 딸이 스타가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쁜 일도 아니고 뒷받침해줄 여력도 있는데 좋아하는 일을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하고 싶어하던 노래를 배우고부터는 내성적이던 딸의 성격이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그것만으로도 레슨비가 아깝지 않다는 것.
심양의 경우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 심동성씨(42)보다 강남에서 바를 운영하는 어머니 김희자씨(42)가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케이스. 김씨는 TV 가요 프로그램에 낯선 가수들이 나오면 “쟤들이 누구냐”며 묻고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하는 등 심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쓴다. 어릴 때 심양이 “탤런트가 되고 싶다” “가수가 되고 싶다”며 기를 쓸 때만 해도 “그러다 말겠지”했던 김씨는 학원에 등록하고 나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하는 딸의 모습에서 진심을 읽었다고 말했다.
댄스 개인 연습실에서 강사에게 일대일 레슨을 받고 있는 아들 김해성군(16)을 연습실 바깥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권모씨(48)는 아들을 억지로 이끌고 와서 등록을 시킨 경우. 권씨는 “평소 춤을 좋아하지만 적극적으로 표현을 못하던 아들에게 춤을 제대로 배우게 해주고 싶어서 이 곳 저 곳 알아보다가 이 곳으로 데리고 왔다”고 설명했다. 의사 커플인 권씨 부부는 아들이 원한다면 연예계로 진출하는 것도 기꺼이 지원해줄 생각이다.
연예교육은 언제가 적기일까. 천성일씨는 대중가요의 경우 강의를 곧이곧대로 따라만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소화할 수 있는 사춘기 무렵에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작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감성이 예민한 시기라 그 전까지는 발달하지 않았던 음악성이 실기와 맞물리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는 것.
반면 춤은 몸이 유연한 어린 나이에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는게 중론이다. 홍영주씨는 “초등학교 1학년쯤 되면 리듬을 제대로 탈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발전 속도도 빨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키디댄스반의 진도가 성인반 진도에 비해 훨씬 빠르다.이곳의 김대용 공동대표는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노래라도 시켜야겠다’며 소질이 없는데도 억지로 등록 시키려는 부모도 가끔은 있다”며 “연예인이 되겠다는 게 자녀 본인의 꿈인지 아니면 연예인으로 만들겠다는 부모의 욕심인지 가려내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