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도 금방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버튼에 명령만 하면 금방 미국 ‘바나나 리퍼블릭’의 양털 스웨터도 사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안방도 훔쳐볼 수 있다. 3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프랑스 용병부대 지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버튼화에도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다는 완전가능성과 무한자유에의 신봉은 지금도 판을 치고 있는 만병통치약이나 ‘낙원〓천국’의 약속에 매혹되는 것과 하나 다르지 않다. 정말 고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인가 보다.
그래서 버튼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이 늘고 있다. 휴대전화를 집에 놓고 왔다고 출근길 전철에서부터 안절부절해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버튼부재(不在)를 마치 신체적 장애보다 더한 치명적 장애인 것처럼 느낀다. 이 단추인간(버튼맨)은 스스로가 그만 단추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러지는 않았던가. -제발 나를 지금 눌러주오.
이 버튼이 사라질 날이 온다고 한다. 음성으로 다 처리되는 기술이 완성 단계라고 들었다. 어느 기술은 마음 속 결심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버튼을 넘어서 센서의 시대가 닥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자기술인간은 그것만으로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센서를 작동시켜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서 얻는 해결이나 만족은 공통화 ‘공용화’한 것들일 뿐, 나에게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니 인간에겐 버튼도 센서도 없는, 그 반대의 세계, 나만의 세계도 필요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 인간은 반은 전자기술인간, 나머지 반은 원시인간 또는 나, 혼자, 라는 고독한 단독자(單獨者)가 필요할 것이다. 그 밸런스가 우리를 인간답게, 나답게 할 것이다.
이 계산은 우리가 신도 될 수 없지만 짐승도 될 수 없고 그 반씩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다. 즉각적 만족만이 삶이 아니라는 말이고 우리, 라거나 너, 라는 타자(他者)가 없는 나, 만의 세계도 역시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꼭 절반씩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사람에 따라 그 섞임의 비율이 다를 수 있고 달라야 한다. 그것이 너와 나의 차이, 개성있는 각자를 만든다. 지금 나 같으면 앞의 인간이 30퍼센트 정도라고 생각하듯이.
제발 혼자 좀 있어보시오, 라는 말을 그래서 해보는 것이다. 때로는 TV를 끄고 휴대전화도 끄고 혼자 밤거리를 어슬렁거려보시오, 하는 것이다. 등산을 좋아한다면 가끔은 혼자 떠나라는 것이고 생맥주를 즐긴다면 비오는 밤 혼자 바에 우두커니 앉아있어 보라는 것이다. 그 때 당신은 자기 혼자가 세상과 마주선 것을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것도.
물론 책을 보시오, 라고 하고 싶다. 그것도 소프트하고 말랑말랑하기만 한 책보다는 어렵고 꺼끌꺼끌해서 남들이 잘 보지 않을 것도 같은 책들, 말하자면 김연수의 장편소설 ‘굳빠이 이상’ (문학동네·2001)이나 이승훈의 시집 ‘인생’ (민음사·2002)을. 밤 10시에 의자에 깊이 내려앉아 책을 펼치고 30분도 한 시간도 읽어가는 경험. 니체의 사막을 터벅터벅 혼자 걸어가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박의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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