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예술이 한창 꽃을 피우던 19세기 중반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사회는 열정에 넘치는 젊은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슈만은 결국 면사포를 쓴 클라라 비크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가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전기(傳記)주의’적 방법은 20세기에 들어와 예전과 같은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됐다.
천재적인 기질의 사람이었으므로 천재적인 작품을 낳았다던가, 고생이 많았던 사람이었으므로 작품에 슬픔이 서려있다는 식의 분석은 너무 뻔하다는 것이었다. 좀 더 ‘과학적’인 방법이 없느냐고, 새로운 시대의 음악학자들은 물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예술가의 생애를 연구하는 일에 다시금 주목하게 됐다. 청각장애 등의 시련과 신분상승의 욕구를 빼놓고 베토벤의 다이내믹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의 전기주의적 시각에서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슈만의 음악에는 분명 낭만주의 전성기에 살았던 젊은 작곡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바그너나 리스트와 같은 ‘바람둥이의 열정’과는 또 다르다. 그의 작품 제목에 나타나는 ‘헌정(Widmung)’의 느낌과도 같은 헌신, 끈기, 묵묵함 속에서 내연(內燃)하는 열정을 뜻하는 것이다. 그 정수는 부인 클라라와 작곡가 자신에게 가장 친숙했던 악기,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A단조(1845)에서 나타난다.
오랫동안 이 작품의 최고 명연으로 여겨졌던 음반은 카라얀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가 협연한 엔젤사의 음반(1948년 녹음)이었다. 리파티는 이 앨범이 녹음된 2년 뒤 백혈병으로 눈을 감았다.
‘백조의 노래’와도 같은 이 음반을 들으며 숱한 여성들이 눈시울을 붉혔던 것도 당연하다. 사연만 애절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육체적 컨디션 속에서도 감정의 고조를 정밀하게 설계한 그의 연주속에는 한 예술가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정신의 사투가 반영돼 있다.
최근 선을 보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니클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협연음반(1992년 녹음·텔덱)은 최고의 테크닉과 당당함을 지닌 이 시대의 명연이다. 아르헤리치 특유의 약간 서두르는 듯한 긴장의 미학과 집중력은 경쟁자들의 연주를 다소 따분하게 들리도록 만든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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