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넓을 박 蹟-자취 적 顧-돌아볼 고
宴-잔치 연 埋-묻을 매 焚-태울 분
博士는 본디 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의 魯(노)와 宋(송)나라에서 두었던 官職(관직)이었다. 그 뒤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은 學識(학식)이 높고 古今(고금)의 事蹟(사적)에 두루 能通(능통)한 인물 70명을 뽑아 博士로 임명하고는 國政(국정)의 顧問(고문)으로 삼았다.
천하를 통일한 지 8년이 지난 기원전 213년의 어느 날, 都邑(도읍) 咸陽(함양. 현재 陝西省 西安일대)의 宮(궁)에서는 治績(치적)을 自祝(자축)하는 성대한 酒宴(주연)이 벌어졌다. 酒興(주흥)이 고조되면서 儒家(유가)와 法家(법가)의 博士가 秦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論爭(논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유독 儒家의 博士 淳于越(순우월)만은 秦의 정치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지식인을 대량으로 生埋葬(생매장)시키게 되니 그것이 유명한 焚書坑儒(분서갱유)다. 이 사건은 결국 秦나라의 멸망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중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博士가 아닐까?
그러나 博士가 學官(학관·교육담당관리)으로 임명되게 된 것은 漢(한)나라 때부터다. 특히 漢武帝(한무제·B.C 140∼B.C 87)는 五經博士(오경박사)를 두어 經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게 했다.
博士가 특정분야의 전문 지식인을 指稱(지칭)하게 된 것은 魏晉南北朝(위진남북조) 이후부터다. 그래서 당시에는 律學(율학), 醫學(의학), 算學(산학), 占卜(점복) 등의 분야에서 각기 博士가 있었다. 하지만 宋나라에 오면 博士의 호칭도 넘쳐 나 酒博士(주박사), 茶博士(차박사)까지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博士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던 것 같다.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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