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열었으나 지키지 못했다. 닫힌 바다를 어찌하랴. 천년을 닫힌 바다를 열자….”
천민 출신이었으되 누구보다 고상한 이상을 가졌던 장보고(?∼846). 그가 못다 이룬 ‘해상왕국의 꿈’을 노래하는 청해진 백성들의 합창으로 공연의 막이 내리자 파리 중심가의 모가도르 극장에서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1700석의 극장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출연진의 무대 인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브라보’를 연발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파리 무대에 극단 현대극장의 창작 뮤지컬 드라마 ‘해상왕 장보고’(김지일 작·김진영 연출)가 한국 뮤지컬 사상 처음, 아니 한국 대형공연 사상 처음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파리에서는 프랑스 측이 주최하는 행사에 한국 예술단이 초청받아 공연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뤘다. ‘해상왕 장보고’처럼 100명 이상이 출연하는 대형 공연물을 직접 들고 와 무대를 개척한 것은 이번이 처음.
95년부터 22개국 24개 도시에서 공연한 ‘해상왕 장보고’지만 파리 무대에 서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프랑스 공연계가 큰 장벽이었다. “파리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겠다”는 현대극장 최문경 이사장의 꿈은 중간 규모의 극장에서, 그것도 29, 30일 이틀간의 공연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한계는 공연에서도 드러났다. 작품의 원래 스케일 보다 무대가 좁아 청해진 앞 바다에서의 해전 장면은 박진감을 잃었다. 김지영 연출가는 “군무(群舞)에 등장하는 사람 수를 줄이는 등 좁은 무대에 공연을 맞췄다”고 말했다.
극장측은 리허설 날짜도 공연 전날과 당일 이틀 밖에 주지 않았다. 맞춰 볼 시간도 부족했다. 주역인 박철호는 “사상 첫 파리 공연에서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럼에도 공연 이틀 전 파리에 도착한 출연진들은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열심히 뛰고 춤추고 노래했다. 일간지 르피가로는 “노래가 아름답고 고전적이며 환상적인 의상과 신선한 무대 효과가 돋보였다. 곳곳에서 예기치 않게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멋지게 조명하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극장에서 만난 엘렌 다코스타 라디오 프랑스 아시아 담당 해설위원은 “한국에 장보고같은 진취적인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 깊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에는 2010년 여수 세계 박람회 유치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박람회사무국(BIE) 각국 대표들이 많이 초청됐다.
이들은 “한국에 그처럼 오랜 바다 개척의 역사가 있는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천년 전 못 이룬 해상왕국의 꿈이 ‘바다와 땅의 만남’을 주제로 내세운 여수의 박람회 유치로 불을 지피기 바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