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딩크(DINK·맞벌이하면서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족은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여유를 바라는 아내가 주도하는 것으로 분석돼 왔다. 한국이 세계적 저(低)출산 국가가 된 이유도 전문직 고소득 아내의 출산기피, 한 자녀만 둔 ‘싱글 키드 가정’, 미혼을 고집하는 ‘싱글족’ 등으로 설명돼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편’이 저출산의 새로운 키워드로 조명되고 있다. 동아일보 위크엔드팀과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NHN이 20대 이상 남성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공동 설문조사에서도 이같은 경향이 일부 나타났다. 통계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지만 이 조사에 참여한 2235명 가운데 현재 자녀가 없는 30대 기혼남성 124명 중 8.1%가 “앞으로도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남편이 주도해 아이를 두지 않은 30대 부부 두 쌍을 만나 그들의 현재 생활, 미래 설계에 관해 들었다.
●여행 노후설계에 아낌없이 투자
김진홍 농심 켈로그 마케팅부 부장(36)은 초등학교 동창생인 부인 서윤희씨(35)와 24세 때인 1991년 결혼했다. 김 부장이 회사에 다니다 군대에 갔을 때였다.
‘결혼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살아야 한다’는 김 부장의 생각과 달리 부모댁으로 들어가 경제적으로 의존해 살아야 했던 상황 때문에 신혼 때는 아이 가질 여유가 없었다. 제대 뒤 부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주말에 주로 여행을 다녔어요. 시골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생활이 너무 좋았죠. 귀국한 뒤 취업하고는 ‘그동안 놀기는 많이 놀았으니 이제부터는 열심히 일하자’며 3년 동안 휴가도 없이 일했어요.”
부부는 자신들의 힘으로 서울에 집을 사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 3년 전 강남에 34평짜리 아파트를 사면서 이를 실현했다.
“둘이 열심히 벌어서 집도 장만하고, 휴가 때 넉넉한 자금으로 둘만을 위해 투자하고…. 이런 식으로 생활하다 보니 아이가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자리잡았죠.”
명품 수입 회사에 다녔던 아내 서씨는 한 달 전 퇴직했다. 패스트푸드점 개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부부가 지금처럼 월급쟁이 생활을 할 경우 노후에 ‘여유있게 살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연봉이 많은 제가 계속 직장에 다니고 아내는 사업을 시도하는 ‘포트폴리오’를 몇 년 동안 짜왔어요.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니, 이때 시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업이 잘될 경우 노후에는 돈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여행도 다니고, 현지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배우는 아주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부장 부부는 45세 전에, 늦어도 50세까지는 은퇴한 뒤 서울을 떠나 자연을 가까이에 둔 삶을 꾸리고 싶어한다. 은퇴 후 미국의 한적한 시골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 부장의 부모처럼….
“동창회에 나가면 예전에는 친구들이 가끔 물었어요. 왜 애를 낳지 않느냐고. 그러면 ‘못 낳는다’고 대답했죠. 다시는 묻지 않더군요.”
그는 다행히 ‘간섭하기 좋아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간섭받지 않는 환경 아래 살고 있다. 처음 의아하게 생각하던 친구들은 “그렇게 사는 것도 방법”이라고 이제 인정해 준다. 부모는 “나는 너희가 있어서 늘그막에 이렇게 좋다. 그러나 너희의 인생은 너희의 것”이라며 후손을 강요하지 않는다.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직장 동료들은 “그래도 낳아야지” 정도로 가끔 지나가는 말을 할 뿐이다.
김 부장은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조카를 봐도 처음에는 예뻐요. 그러나 잠깐이죠. 저는 아이가 부담스럽거든요. 내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야 하잖아요.”
●“늙어서 외로운 것도 내가 선택”
처음에는 사랑으로, 나중에는 아이 때문에, 그 뒤에는 정(情)으로 사는 게 부부라지 않는가. 결혼 12년차인 이 부부를 이어주는 끈은 무엇일까.
‘닮은 꼴’이라는 게 김 부장의 답이다. 사물을 보고 평가하는 방식이나 유머 감각 등에서 아내와 ‘똑같다’고 느낄 때 서로를 묶는 끈을 확인한다. 특히 부부는 2년째 키우고 있는 코커스패니얼종의 개 두 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자주 싸우기도 해요. 사소한 다툼은 벌이지만 심각한 갈등은 없었죠. 끈이라…. 아마 계속 바뀌지 않을까요? 지금은 서로 열심히 일하는 것, 나중에는 세상 여행 다니며 공부하는 것, 그 후에는 아마 외로움이 우리를 하나로 묶지 않을까요?”
그는 60이 넘으면 외로워서 아이가 없는 것을 후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롭다고 느끼는 것 자체도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노년을 위해 김 부장 부부는 1억5000여만원의 부부 합산 연봉을 저축, 종신보험 등에 적립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해외로 여름휴가를 갈 때는 최소 400여만원을 들여 최대한 풍요롭게 보낸다.
●부모 형제들도 이제는 인정
컴퓨터 잡지 한경PC라인의 유석규 사장(39)과 ㈜하이파이브의 트루사르디 유정하 기획실장(36) 부부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젊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 디자이너 출신인 아내 유 실장이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 늘 젊은 감각의 옷을 사기 때문이다. 1993년 결혼한 이 부부의 집에는 아이방이 없는 대신 옷방이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유 사장은 학창시절에는 ‘결혼하면 농구부를 만들 정도로 아이를 많이 낳아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며 차츰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고 결혼과 동시에 양가 부모에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얽매여 살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 해도 한국 사회에서 육아의 책임은 대체로 아내 몫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둘 사이 태어난 애에 대해서는 반반씩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든 아내든 어느 쪽이라도 애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못하게 되거나 지장받는 상황 자체가 싫은 거예요.”
그래도 아내 유 실장은 친정 부모나 친구들의 충고를 듣고는 “낳을 생각이 혹시 있느냐?”고 남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유 사장의 대답은 “둘만 살기 싫어?”였다.
“어차피 한평생 사는데 둘이 즐기며 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것 같아요. 만일 아이가 생기면 강남 학부모들이 흔히 그렇듯 어릴 때부터 학원도 보내야 하고 ‘엘리트’로 키우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하잖아요. 아이에게 그런 스트레스 주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나 자신이 부모로서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평균치 이상의 행복한 삶
유 사장 부부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함께’ 다닌다. 여행을 다니거나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다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주말에 유 사장이 골프를 하고 오면 바로 아내를 전화로 불러내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 술자리에도 다른 멤버들과 달리 유 사장은 꼭 아내를 불러낸다. 아내의 남자친구 집들이에도 함께 다닌다. 반면 부부는 서로의 삶에 대해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아내가 한 번 가면 1주일이 넘는 출장을 매달 다녀도, 남편이 골프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워도 “당신이 좋아하면 괜찮다”고 용인한다.
“오랫동안 우리를 묶어준 건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서로 해 줄 수 있는 것만큼은 최선을 다해 해주는 거죠.”
실제로 유 사장은 집안일을 많이 나눠 하는 편이다. 굳이 말로 약속한 적은 없지만 청소나 다림질 같은 ‘힘쓰는 일’은 유 사장이 한다. 가끔 아내를 위해 밥도 짓는다.
부부가 간섭하지 않는 만큼 남들의 간섭도 받기 싫어한다. 남들의 시선이 인생에서 그다지 큰 잣대가 되지 않는다.
유 사장 부부는 부모에게서 “뜻이 맞는다면 둘이서만 재미있게 살아라”는 격려를 받는다. 가족 중 할머니만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섭섭하다”고 할 뿐 양가 형제들도 간섭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아이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 “너희들이 부럽다”고 말한다. 친구 중 일부는 벌써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를 둔 경우도 있다.
부부 합산으로 1억원이 훨씬 넘는 연봉은 아내 유 실장이 관리한다. 97년에 서울 강남에 27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했고 최근 47평으로 넓혔다.
“아무래도 둘이서 버니까 풍족하게 쓰면서도 삶의 기반은 더 빨리 마련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에게 들일 비용을 좋아하는 일에 쓰고 둘을 위해 투자하는 거죠.”
부부는 50세까지 열심히 일한 뒤 은퇴해서 즐기며 살고 싶다. 도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말이다. 이 생활을 위해 부부는 몇 개의 연금과 저축을 들어놓고 있다.
“이혼한 친구도 있고 별별 인생이 많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는 평균치 이상으로 행복한 거 같아요.”(유 사장)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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