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이안 '목마른 우물의 날들'

  • 입력 2002년 11월 1일 17시 46분


모든 진정한 시인은 농부이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습니다. M형, 이제 차가운 갯벌에 들어가면 온몸이 감전되듯 쩌릿하겠습니다. 전어 철은 벌써 지났지요? 물컹물컹한 뻘 속에서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배우는 형의 근황이 궁금한 십일월입니다.

혹시 이안 시인의 첫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실천문학사)을 읽어보셨는지요. 어젯 밤, 이 시집을 넘기다가 몇 번이나 형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이안 시인은 충북 제천 생으로 올해 서른일곱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1998년에 문단에 나왔으니, 형보다는 한참 후배인 셈이지요. 그런데 신인이 아니에요. ‘경계’에 민감한 감수성이 여간 아닙니다. 단단하고 찰진 생태적 상상력이 든든하게 밑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언어를 알뜰하게 저며낼 줄 아는 솜씨 또한 범상치 않습니다. 군말이 없어요. 사물과 사태의 핵심을 향해 바로 쳐들어갑니다. 그러면서도 잔상 효과가 강한 시들입니다.

이안 시인 또한 형처럼 거대도시를 떠나, 땅에 뿌리박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저도 일면식이 없어서 그가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살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형이 바짝 긴장해야 할 깐깐한 후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시인의 ‘십일월’이란 시가 있습니다. 7행 짜리 짧은 시이지만, 아주 긴 시예요. ‘나뭇잎 벗겨지자/노랗고 향긋한 냄새를 품은 산의/무덤 하나 둘/깨어나 마을로 들어선다/저, 잘 익은 발걸음 소리 들으며/오래 묵어 기운 집 뜰에/몇 알 모과가 빛난다’. 향기와 소리, 빛깔이 다 있습니다. 무덤과 모과가 상봉하는 장면이 놀랍지 않습니까. 무덤이 일어나 마을로 들어서고, 텅빈 시골집을 지키던 모과가 반기다니. 재생, 즉 순환하는 질서에 대한 강렬한 희구일까요? 아니면 농촌 붕괴에 대한 아픈 은유일까요.

이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며칠 들고 다녔습니다. 지하철에서도 보았습니다. 맨 처음에 실린 ‘숨길 1’이라는 시에서부터 숨이 턱, 하고 막혔습니다. 때아닌 우박이 내리는 곡우(穀雨) 아침에 우박과 꽃잎의 해후를 순간 포착한 시인데, 적대적일 것만 같은 우박과 꽃잎이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상극에서 상생으로 일대 전환을 이루며 우주적 질서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침침했던 눈이 다 환해지는 느낌입니다.

M형, 콩 타작해보셨지요? 마당에 잘 여문콩을 놓고 도리깨질을 하는 것인데, 아, 이안 시인은 도리깨로 후려쳐도 꼬투리를 열지 않는 콩을 주목합니다. 그 콩은 ‘쇠죽솥에서 생을 김나게 쪄내고 싶은 것’이랍니다(‘어떤 콩의 열반’). 도리깨질을 견뎌내는 콩, 그 콩이 바로 이안 시인의 작가정신입니다. 이안이란 시인, 이거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흠모해마지 않는 시인들은 다들 이 거대도시를 떠나 있네요. 다들 농부님이네요. 강화도에 사는 형을 비롯해, 지리산 L, 모악산 P, 섬진강 K, 화성 L, 남양주 R… 아, ‘오래된 미래’들. 이 근본주의자들의 명단에 오늘, 이안 시인을 추가합니다. 시인과 농부. 그렇습니다.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그는 아주 빼어난 농부일 것입니다. 저는 올해에도 농부가 못되어 서울 도심, 서대문 어귀에 있는 농업박물관 근처에서 얼쩡대고 있습니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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