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적 지원 별 도움안돼▼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인문학자들 가운데 위기의 원인을 대학 제도가 현대적 형태로 정립되었던 19세기 후반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대학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그 이전까지 대학 교육의 중추를 이루어 왔던 인문학적 고전적 교과 과정이 고유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위기의 발단을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 20세기 초엽에서 찾는 인문학자들도 있다. 20세기 들어 물질문명과 기술공학의 발달과 함께 과학문명이 세계를 압도함에 따라 인문학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위기의식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어떤 주장이든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공연한 핑계일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앞세우거나 외적 환경을 핑계삼는 경우에도, 인문학자들의 위기의식 그 자체는 어떤 형태로든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대책 없이 계속 바깥쪽을 향해 ‘위기’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것인가. 시월 중순 우연히 “인문학이 외면당하는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지 우리 모두 반성해 보아야 한다”라는 취지 아래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어느 교수의 글을 읽게 되었다. 자기 반성을 일깨우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법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인문학의 의미 창출을 곧바로 상품 생산의 라인에 연결시킴으로써 그 경쟁성과 배제성을 살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하나의 예로 각광받고 있는 문화상품의 소재가 되는 ‘이야기’에 눈을 돌려 ‘연구’할 것을 인문학에 제안했던 것이다. 이는 현실에 대응하라는 충고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인문학을 이른바 ‘위기’에서 구출할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인문학이 창출한 의미를 상품 생산에 연결시키는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산업 쪽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문학자란 ‘연구자’이지 문화상품의 ‘생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과 박대를 개탄하면서 ‘이제 인문학은 침체가 아니라 전멸의 상태’임을 진단한 어떤 교수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 이 같은 진단에 이어 그는 인문학 등 기초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안정적인 투자 및 체계적인 교육’ 그리고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적인 지원 정책’을 역설했다. 인문학에 관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고마운 제안이긴 하나, 이런 종류의 구두선(口頭禪)이 인문학을 위기에서 구할 것 같지는 않다. 또 경제적 지원이나 정책적 배려가 구체화되더라도 인문학의 근원적 위기는 해소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벼랑 몰리면 탈출구 보이는 법▼
뾰족한 수가 없다면, 차라리 인문학을 그냥 위기에서 허우적거리게 내버려두는 것은 어떨까. 되풀이해서 묻지만, 인문학이 위기에 처하지 않은 적이 과연 언제 있었던가. 하기야 인문학 자체가 ‘위기의 학문’ 아닌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이 없다면 삶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위기의 학문’이 바로 인문학인 것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인문학이란 그 자체가 삶에 대한 위기 의식의 표현이자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일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인문학은 위기에 몰릴수록 더욱더 융성하고 또 스스로 변화한다. 위기가 의식되는 순간이 바로 인문학에는 기회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위기의식을 기름으로 해 더욱더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것, 스스로를 태우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이 인문학인 것이다. 그러니 제발 인문학을 위기 속에 그냥 처박아두는 것이 어떨는지.
장경렬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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