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레이먼드 브릭스 때문에 눈길이 가는 책이다. ‘스노우 맨’과 ‘산타 할아버지’의 바로 그 작가 아닌가? 우리아이 첫 비디오가 되었던 ‘스노우 맨’, 두 돌 조금 안 되었던 아이부터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까지 온 식구가 모두 좋아했던 그 비디오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내게 이 사람의 이름은 그래서 반갑다.
이 책은 기존 브릭스의 그림책들보다 캐릭터가 더 단순하고 여백이 많다. 책을 덮었을 때 침실 벽과 바닥의 흰색이 먼저 떠오를 정도다. 18년 만에 처음으로 남의 글에 그림을 입혔다더니, 그래서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보다는 앨런 앨버그의 글 자체가 지극히 단순하고 여백 속에 유머가 넘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해내기 적합한 형식은 바로 신문 카툰같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짤막짤막한 이야기들 속에 어쩌면 그렇게 많은 웃음과 따뜻한 인간애가 담겨있는지 참으로 놀랍다. 다섯 가지 이야기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열된 이야기들을 넘어 아주 산뜻한 5막 희곡을 읽은 느낌까지 준다. 게다가 소설로 치자면 일종의 격자소설적 구조를 갖추고 이야기의 매무시를 잡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첫 번째 이야기와 마지막에 침실이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들은 세심한 디테일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색연필로 그려진 화사하고 간명한 그림들은 정적이고 차분한 인상을 주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 5000원짜리 티셔츠를 들고 뛰는 버트 아저씨의 근육질 팔 못지않게 동적인 느낌을 보완해주고 있는 것은 그림자다. 아저씨네 침실엔 거미인지 뭔지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침대 밑에선 고양이가 쉴새 없이 움직인다. 아무리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여도 아기는 “으아앙” 울음을 터뜨려 온 집안을 흐트려 놓고. 디테일의 이러한 세심한 처리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서술방식과 함께 책을 읽어주는 엄마와 듣는 아이들에게 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장치들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림 하나하나에 영국의 일상문화를 고스란히 빼어다 박아 놓았다. 구멍 난 양말이며 좁은 계단, 거미나 벌레가 무시로 기어 다니는 집, 찻잔, 경치는 그만이지만 실로 엉망진창인 스코틀랜드의 날씨, 조금 날씨가 좋으면 반팔로 갈아입고 그래도 장화는 꼭 신고 걸어야하는 강가의 풍경, 그 모든 것이 영국 장삼이사의 삶의 모습 그대로다.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 그걸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내려한 그 노력들이 바로 레이먼드 브릭스를 세계적인 대가로 만든 게 아닐까?
주미사 동덕여대 교수·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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