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을 맡았던 고려대측은 6일 “436년 전에 숨진 임신부와 태아의 시신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밝혔다.
이 미라는 9월 경기 파주시 교하읍 파평 윤씨 정정공(貞靖公)파 묘역에서 발견됐으며 고려대팀의 조사 결과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아기를 낳다 자궁 파열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각종 유류품으로 미뤄 이 여성은 윤원형의 형 원량(元亮)의 아들 소(紹)의 딸로 보인다”고 밝혔다.
윤원량(1495∼1569)은 정3품 당상관 관직인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돈녕부는 조선시대 왕실 외척을 관리하던 부서이다. 아들 윤소는 군수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파평 윤씨 가문은 왕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다. 윤원량의 누이는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였고 윤소의 누이 역시 인종의 후궁인 숙빈이었다.
파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윤소는 정실로부터 아들 하나를 두었고 후실로부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둔 것으로 돼 있어 미라의 주인은 후실 소생의 외동딸로 추정된다.
고려대 팀의 조사결과 이 여성은 키 155㎝에 아담한 체격이었으며 자궁에 2∼3㎝ 길이로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태아는 머리가 모체의 자궁을 벗어나 질 쪽으로 끼어 있었으며 바깥에서 육안으로 태아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고려대팀이 X레이와 자기공명영상촬영(MRI) 등의 검사와 부인의 복부를 직접 절개해 확인한 결과 태아는 모체의 오른쪽 배 위쪽으로 다리를 두고 있었다. 태아의 몸에는 혈흔이 묻어 있었고 태아는 고환을 통해 남자인 것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모자의 시신이 완벽히 반미라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숨질 당시의 계절적 이유와 관의 형태 때문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관에서 ‘병인 윤시월’이라는 한글 묵서(墨書)가 발견돼 숨진 시기는 1566년 윤시월(양력 12월)로 추정됐다. 또 시신은 목관 바깥에 다시 나무로 곽을 만든 뒤 여기에 회를 두른 묘에 묻혀 있었다. 회가 시멘트처럼 굳어지면서 묘가 외부와 차단돼 거의 진공 상태에서 보존됐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부인이 친정에서 결혼해 아기를 낳다 숨지는 바람에 시가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문중 묘역에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립민속박물관 김영재 학예사는 “이는 결혼한 뒤 아기를 낳을 때까지 남편과 함께 친정에 머물다 시가로 가는 ‘우귀(于歸·해묵이)’의 풍습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미라 묘역에서는 한글 편지 한 통과 초서 편지 두 장도 함께 발굴돼 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주성원기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