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은 빈 공간을 상징한다. 빈 공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것은 규정 불가능한 힘을 가지는 기호인 동시에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매춘부’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르네상스시대의 ‘무(無)’와 ‘0’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무’의 표상화가 갖는 의미를 드러낸다. 유럽 수학에 아라비아 수 체계가 도입되고 뒤이어 ‘무’의 표상인 ‘0’이 더해지면서 수는 물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추상적 개념이 됐다.
‘무’를 표상화했다는 것은 기호의 혁명이다. 존재할 수 없는 ‘무’가 표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표상의 엄청난 힘을 보여준다. 이것은 존재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무’의 기호화는 지폐, 신용장, 면죄부처럼 ‘무’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재화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신용카드나 전자화폐로까지 도약하고 있다. ‘무’에 바탕을 둔 경제는 지불 약속에 대한 ‘신뢰’의 경제다. 이런 의미에서 ‘무’는 문자 언어의 토대일 뿐 아니라 경제의 토대이기도 하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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