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순수美 겨울숲…광대한 풍광 ‘일상’ 벗고 만나라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3시 32분


오대산 상원사에서 바라본 겨울 잡목숲

오대산 상원사에서 바라본 겨울 잡목숲

겨울 숲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연의 힘’을 체험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또 속도의 강박증에 걸린 채 살아온 고단한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겨울 숲으로 떠나보자. 오관을 열고, 숲 향기 숲 소리에 취해보자. 올 겨울 가볼 만한 숲 5곳을 꼽아봤다.

어떤 사람들은 “꽃도 단풍도 없는 겨울 숲을 뭐 하러 찾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숲이라곤 가본 적이 없거나, 등산할 시간조차 마련치 못하는 게으른 사람들의 핑계일 뿐이다. 서릿발을 밟으며 듣는 대지의 소리,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 물 소리, 창공을 가로지르는 겨울 숲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겨울 숲은 수묵(水墨)의 세계다. 파스텔화처럼 청신한 신록이나 유화처럼 현란한 단풍을 즐길 수는 없지만 회갈색 톤의 절묘한 농담으로 표현되는 겨울 숲엔 겨울 숲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겨울 숲의 진수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에서 찾을 수 있다. 잎을 떨군 곧추 선 줄기의 단정함과 엄동설한을 이겨내는 강건한 숲의 모습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적막과 잘 어울린다.

겨울 숲의 또 다른 진면목은 숲을 지나는 찬바람에서 찾을 수 있다. 숲을 지나는 겨울바람은 매섭지만 비장함이 있어서 좋다. 찬바람과 맞설 수 있는 강건함과 자연의 운행 속도에 순응하는 냉정함은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우리네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물질문명에 찌든 정신을 곧추세운다.

겨울 숲은 산업문명의 틀 속에 안주해오는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적막함, 강건함, 냉정함, 비장함을 체험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겨울 숲은 한적하다. 숲을 찾은 시간엔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숲을 찾는 길에선 효율성을 숭배하고 속도의 강박증에 걸린 채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숲에는, 특히 겨울 숲에는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다. 대신에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해 있다. 겨울 숲의 적막함, 강건함, 냉정함, 비장함을 속속들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숲을 찾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두고 가야 할 것과 가지고 떠나야 할 것들을 챙기는 일이다. 두고 가야 할 것은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이나 걱정이다. 고단한 일상을 잠시 잊어야만 자연이 주는 즐거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겨울 숲에 들어서기 전에 새롭게 챙겨야 할 것은 감성의 그릇이다. 산업문명은 보다 강렬하고 현란한 것에 익숙해지도록 우리의 감성을 변화시켰다. 인공의 감성 대신 자연의 감성을 가득 담고 떠나보자.

그렇다면 겨울 숲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우선 오대산과 대관령이 손꼽힌다. 겨울 오대산에선 잡목숲의 적막함과 전나무가 연출하는 역동적인 활력을 맛볼 수 있다. 대관령 휴양림에서는 강한 북서풍에 맞서는 겨울 소나무의 강건함을 느낄 수 있다. 강원도 삼척 중경릉의 소나무 숲과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전남 장성의 삼나무 편백 수해(樹海)에서도 겨울 숲의 백미를 느낄 수 있다. 겨울철 색다른 풍취를 원한다면 제주 비자나무 숲을 찾을 일이다.

▲ 오대산의 잡목숲과 전나무 숲 ▼

오대산 월정사 주변의 전나무 설경.

‘雨中月精 雪中五臺(비 오는 날은 월정사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최고요, 눈 오는 날은 오대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구절은 겨울 오대산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한다. 예로부터 월정사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오대산의 겨울 숲 풍광에 그대로 적용된다.

수은주가 떨어지고 눈마저 쌓이기 시작하면 높은 산의 풍경은 보다 단순해진다. 자연은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회색톤의 추상화로 거듭 태어난다. 상원사 앞뜰에서 남동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눈에 들어오는 잡목숲이 바로 그런 숲이다. 탁 트인 시야로 눈앞에 나타나는 잡목숲의 풍광은 자연만이 창조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 간결한 구성에, 그 소박한 절제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잡목숲이 연출하는 이런 간결함과 소박함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겨울 숲을 찾아 나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겨울 숲이 연출하는 적막함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청량제 구실을 한다. 찬 북서풍은 온갖 방향으로 날뛰던 원색의 욕망을 잠재우고,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풍광은 세속에 찌든 심신을 새롭게 소생시킨다. 자연의 영성과 인간의 영혼이 만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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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앞마당은 우리 숲의 진면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진귀한 조망대 역할을 한다. 상원사 앞마당이 특히 주목을 끄는 이유는 한곳에 서서 고개만 조금 돌리면 전혀 다른 숲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쪽을 향해 서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잡목으로 이루어진 회갈색의 나목들이 능선에 늘어선 적막한 풍경을 접할 수 있고,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역동적인 전나무 숲의 아름다운 활력을 느낄 수 있다.

월정사의 겨울 전나무 숲은 오대산 숲의 백미다. 오대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어디 전나무뿐이랴만, 겨울 오대산을 지키고 선 전나무의 의젓함과 당당함을 보면 누구나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1km의 전나무 숲길의 설경은 이 땅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광을 선사한다. 부도밭 주변의 겨울 전나무 숲에서는 신성마저 느껴진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나 유물을 묻는 석물을 말한다.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부도 주변을 에워싼 전나무 숲의 겨울 풍광은 절 아래 전나무 숲과는 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다. 고승의 유택이기에 숲에도 엄숙함이 배어 있나 보다.

▲ 대관령 휴양림의 소나무 숲 ▼

대관령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당당히 맞선 금강송.

‘한국의 3대 아름다운 소나무 숲’ ‘문화재 복원용 소나무 공급 기지’. 대관령 휴양림의 소나무 숲을 상징하는 말이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대관령에 오르면 동쪽으로 멀리 강릉과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발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융단처럼 펼쳐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산림청은 이곳에 1988년 전국 최초로 자연휴양림을 조성했다.

대관령 옛길을 따라 해발 841m의 제왕산까지 400ha에 걸쳐 펼쳐진 이 소나무 숲이 사람이 만든 숲이란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산림청의 기록에는 정확히 1922년부터 26년 사이에 사람이 일일이 솔씨를 뿌려 숲을 만든 것으로 나와 있다. 종자를 직접 임지에 뿌려서 만든 흔치 않은 숲인 것이다.

대관령 자연휴양림의 소나무.

소나무는 이 땅에서 가장 흔한 나무다. 그래서 소나무와 관련된 우리의 정서는 유별나다. 장관급 벼슬을 가진 정이품 소나무도 있고,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석송령(石松靈) 소나무도 있다. 600여년 전 조선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목멱산(木覓山)에 심었던 나무도 소나무고, 애국가 가사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나무 이름도 소나무다.

그러나 겨울 대관령의 소나무 숲을 한번 둘러보면 지금껏 봐왔던 왜소한 소나무, 굽은 소나무에선 느낄 수 없었던 감흥을 갖게 된다. 장대한 소나무 숲 사이에서 비굴해지고 왜소해진 자신을 걷어내고 잠시나마 당당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다. 겨울 솔숲이 가진 강건한 기개와 꺾이지 않는 기상이 우리들 가슴속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대관령 솔숲의 이런 강건한 기개와 꺾이지 않는 기상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다. 백두대간을 휘몰아치는 찬 북서풍에 한순간도 꺾이지 않고 80여년 동안 당당히 맞서왔던 대관령 소나무의 강단 덕분이다. 왜소하거나 굽은 소나무를 찾아볼 수 없는 강건한 숲의 자태가 경이로울 정도다.

▲ 장성의 삼나무 편백 수해 ▼

장성의 삼나무 숲 속(위). 전남 장성의 삼나무 편백 숲은 임종국씨가 조성한 인공림이다.

수해(樹海)란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숲의 바다를 일컫는 말이다. 눈길 가는 곳에 산이 있고, 산이 있으면 으레 숲이 있으니 우리들 대부분은 숲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겨울 숲 하면 앙상한 가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울에도 녹색으로 바다를 이룬 장대한 숲을 찾을 수 있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에 있는 삼나무, 편백 숲이 바로 그곳이다.

이 숲은 인간의 의지와 집념이 국토의 얼굴까지도 변모시킬 수 있음을 생생하게 전하는 현장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는 우리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무심기에 쏟은 한 개인의 의지 하나로 북하면 일대는 황량한 임지에서 생명이 넘치는 땅으로 변모했다. 그 주인공은 장성 출신의 임종국씨다. 임씨는 ‘20세기 국토녹화 위업’을 빛낸 인물로 선정됐고, 그가 만든 숲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2세기를 위해서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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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산하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 때, 녹색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짜릿하다. 희망과 번영, 자연을 상징하는 장성의 녹색 숲은 현대문명병을 치유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묘약일지도 모른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수해에서 빠름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자.

▲ 준경릉의 소나무 숲 ▼

정이품송과 결혼한 한국 제일의 미인송

한 시인은 ‘聖의 의미를 되씹고 싶을 때엔 준경묘에 가라’고 준경릉의 소나무를 예찬했다. 강원 삼척시 미로면에 자리잡고 있는 준경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를 모신 능으로 주위는 장대한 소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준경릉 숲은 조선 태조의 조상을 모신 데다 교통이 좋지 못한 오지인 덕분에 500여년 동안 토종 소나무의 유전적 원형을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귀한 솔숲이다.

준경릉의 소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 토종 소나무의 원래 모습이 볼품없이 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쭉쭉 뻗은 곧고 우람한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준경릉의 솔숲이다. 준경릉의 한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신부 소나무로 간택되어 작년에 정이품송과 결혼식(꽃가루받이 행사)을 올렸고, 올해는 자식(종자)을 생산하는 영광도 누렸다.

겨울 숲의 또 다른 매력은 숲 소리다. 겨울 숲이 만드는 소리 중에서도 솔숲이 만드는 소리는 격이 다르다. 소나무 숲은 쉽게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한번 목청이 터지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가락과 화음을 만들어낸다. 찬바람이 솔숲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지는 ‘쏴아’ 하는 솔바람 소리는 영혼을 흔들고 자연을 깨우는 소리다.

준경릉의 수호신장 소나무.

다른 나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소나무는 바람이 있어야 제값을 나타낸다. 한 시인은 솔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라야 별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솔바람 소리가 오죽 영묘하면 밤하늘 별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신묘한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다고 했겠는가. 솔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이며, 바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인 것이다.

준경릉의 솔밭에서 오관을 열고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 시베리아를 지나온 바람이 머금은 장대한 풍광을 가슴에 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조상들은 송성(松聲)이니 송운(松韻)이니 하면서 겨울 솔바람 소리를 특히 아꼈는지도 모른다.

박희진 시인은 준령릉의 소나무 숲을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준경묘 본 뒤 뇌리엔 자나깨나 금강 長松林/ 나 못 잊겠네 죽죽 뻗은 그 자태 하늘 향하여/ 백년 또 백년 오로지 上昇 한 길 神松 될 밖에/ 하늘 땅 솔이 합심해 이룩해낸 神聖의 영역/ 상상만 해도 고개가 숙여지네 반만년 老松.” 소나무가 상징하는 지조·절조·절개와 같은 덕목들이 거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곳이 준경릉의 솔숲이다.

▲ 색다른 정취의 제주 비자림 ▼

비자나무와 비자나무 열매(아래)

제주의 비자나무 숲에선 뭍에서 쉽게 체험할 수 없는 이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한겨울 수묵화를 두루 섭렵한 뒤에 한번 찾아가볼 만하다. 이곳에선 25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아왜나무, 비목, 팽나무, 무환자나무, 자귀나무, 예덕나무, 때죽나무, 덧나무 등과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제주 비자나무 숲이 간직한 장점 중 하나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준비돼 있다는 점. 평탄한 지형을 이용한 숲길은 인공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래 전부터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길로 느껴진다.

산책로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수십 종류의 지피(地被) 식생이 어울려 살고 있는 생존경쟁의 현장을 볼 수 있고, 덩굴식물이 다른 식물의 줄기나 가지로 눈을 옮기며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관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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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가 일찍부터 제주의 중요한 토산품으로 이름을 얻은 까닭은 비자나무 열매가 구충제로서의 약효를 가진 점과 비자나무가 재목으로서의 아름다움를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 구충제로 쓰이는 비자나무 열매의 약효는 특출하다. 하루에 일곱 알씩 7일간 복용하라는 처방전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빠름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삶에서 자연을 관조하면서 그 미묘한 변화에 관심을 두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숲을 비롯한 자연에는 공리적으로 셈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온갖 만물이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생태학적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 겨울 숲이 있다. 겨울 숲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광대한 풍광을 벗삼아 가슴을 활짝 펴보자.

글·사진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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