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을 전공한 그는 결혼 후 꽤 탄탄한 유니폼 회사를 17년간 운영하다 잠시 쉴 때 우연히 ‘시와 시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잡지사 운영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광고비를 지원하던 중 회사 인수제의를 받았는데 처음엔 망설였다. 그러나 남편은 ‘당신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뭐든 한번 빠지면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 탓에 그는 시와 사랑에 빠졌다. 어쩌다 목욕탕에서 마사지 한 번 받을까 싶다가도 ‘이거 안하고 돈 모으면 시집 1000부는 찍을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자꾸 자신에게 들어가는 몫은 다 생략해 버린다.
2000년 8월 ‘시와 시학사’를 인수한 뒤 그는 18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는 자신이 펴낸 시집들을 ‘자랑스러운 내 시인, 내 시집’이라고 부른다. 지난해와 올해는 고재종(소월시 문학상) 서정춘(박용래 문학상) 반칠환(서라벌 예술상) 최종천(신동엽 창작기금) 이승하 시인(지훈 문학상)의 시집 등이 잇따라 문학상을 휩쓸면서 시를 고르는 그의 남다른 안목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무실 옆에 ‘시집박물관 시떼’라는 문화사랑방도 만들고 수제본 시집을 선보이는 등 시를 위해 온 정성을 쏟아왔다. 그런 그를 보고, 한 원로시인은 ‘우리 시문학에 좋은 천사가 왔다’고 칭찬했을 정도.
#자비 출판은 절대 안한다
출판사를 인수할 때 한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자비출판은 절대 안 하되 좋은 시인을 발굴해 인세 주고 좋은 시집을 만들겠다는 거죠. 공들여 만든 시집은 다 제 몫을 한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숨어있는 시인들을 찾아내고 싶어서 투고된 원고를 최우선적으로 검토합니다. 시는 서정이자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범주에 드는 시를 우선적으로 고르죠. 자존심을 가진 시인들을 제대로 대접하고 싶어요. 안 내기로 결정한 원고도 함부로 취급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서 돌려보냅니다. 이번에 인연이 아니라도 또 다음 정거장이 있기에….
시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시를 만나는 일이 시 출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만 좋으면 문단에 연줄이 없어도 시집을 당당하게 낼 수 있는 풍토를 만들고 싶어요. 첫 시집을 내기 위해 순정한 마음으로 시를 써온 사람들, 시집 한 권 내고도 10년씩 기다리는 사람들이 내가 발굴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시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시는 우리들 마음, 조금 더 나아가 영혼의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말고 짧게, 그래서 긴 글보다도 더 깊고, 더 오래 감동이 남죠. 시는 그렇게 시를 읽는 이의 깊은 마음을 건드리는 거지요.
돈 많이 세면서 늙는 것보다 시 많이 읽으면서 늙고 싶어요. 내 소망은 늙어서 예쁜 할머니 얼굴을 갖는 것이거든요. 부자든 가난하든 자신의 생각과 삶을 얼굴에 담고 늙어가잖아요. 시문학 동네에 혹여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죠.
#시집마다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시집을 내는 일 역시 시적이어야 하고 시인을 만나는 일 역시 시적이어야 하고. 시를 읽는 이들의 이야기 역시 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반칠환 시인의 이야기인데요, 등단 10년 만에 원고를 들고 오셨더군요. 가까운 남한산성 숲으로 가서 원고를 읽다가 펑펑 울어버렸어요. 왜 울었는지 시집을 읽어보시면 알 거예요. 그런 시를 만나게 돼 책을 만들고,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 시집 안에 ‘누나야’라는 시가 있는데 그 주인공이 시골 보건소에 근무한답니다. 얼마전 지역 군수가 보건소 사람들을 초청한 모임에서 ‘누나야’라는 시를 읽다가 눈물이 나서 낭송을 마치지 못했대요. 군수는 격려의 말을 고민하다가 시로 대신했는데 그 시를 듣는 사람 속에 바로 ‘누나야’가 있었다는 이야기죠. 시골에서 고생하는 어여쁜 사람들이 행복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에 저도 행복해졌어요.
#새 시집문화를 만들고 싶다
시인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제 행복이에요. 작년에 서양식 수제본 시집을 만들어 시인들이 기뻐했는데 이번 해부터 조선식 수제본을 만들 생각이에요. 우리나라 닥종이를 가지고, 우리식 제본으로 만들 거예요. 집에서 늘 돈을 가져다 메우지 않고도 시 출판에 거침없이 투자할 수 있는 유능한 출판인이 되는 것이 바람이죠.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