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에서 뇌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온갖 비밀을 빼간다. 청와대도 한통속인지 민원을 접수시켜도 답이 없다.”(30대 남성)
도청(盜聽)이 정치 사회문제로 불거지면서 언론사에는 도청 피해를 호소하는 온갖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상당수는 이처럼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피해망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하소연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최근 도청과 몰래카메라 등의 확산이 사회 구성원들의 피해의식을 부추기고 있다”면서 “피해의식이 지나쳐서 정신병으로 진행돼 고통받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말한다.
▽피해의식도 정도가 있다〓피해의식은 인간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본성.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피해의식에 젖는 ‘피해망상(被害妄想)’도 자기 보호를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망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병이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피해망상도 종류가 많다.
우선 억울한 일을 겪은 뒤 누군가 날 괴롭히거나 감시한다는 생각 때문에 공포나 불안감이 지속돼 생활이 불편하다면 ‘신경증적 망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에는 보통 ‘아닐거야’하고 되뇌면서도 괴로워하는 것이 특징.
고집이 세고 남을 잘 의심하고 불안에 잘 젖는 사람은 ‘편집증적 성격장애’인데 이 경우에는 없는 일을 지어내 생각한다. 그러나 헛생각이 생겼다가 금세 없어지고 늘 머리를 맴도는 특정한 망상은 별로 없다.
피해의식이 정도를 넘으면 가정이나 사회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망상장애와 정신분열병이 그것이다.
▽심각한 망상〓앞서 예를 든 20대 여성은 망상장애의 대표적 종류인 피해망상장애 환자일 가능성이 크다. 망상장애는 편집장애라고도 불린다. 최소 한 달 이상 실제 일어나지 않은 도청, 독살, 감염 등 때문에 괴로워한다. 또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거나 연인 또는 배우자가 부정(不貞)을 저지르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망상장애자는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단정하기 때문에 인격이 허물어진 정신분열병 환자와는 금세 구분할 수 있다. 정상인과 구분이 쉽지 않지만 대화를 하면서 곰곰이 살펴보면 의심이 많고 시비를 잘 가리려 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망상장애자는 대부분 평소 우울감을 느끼며 정신분열병 환자에게 나타나는 환각이나 환상은 거의 없다.
피해 망상의 종류도 다르다. 망상장애자가 “경찰이 따라다닌다” “상사가 의도적으로 괴롭힌다” 등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생각을 한다면, 정신분열병 환자는 “미확인비행물체(UFO)가 감시한다” “정부에서 뇌의 정보를 자꾸 빼간다” 등 불가능한 망상을 한다.
앞에서 예로 든 30대 남성은 뇌의 이상으로 사고나 감정의 조절능력이 허물어진 정신분열병 환자일 가능성이 크다.
▽망상의 대책〓피해망상을 갖고 있는 사람 중 정도가 가볍다면 자신감을 찾는 것만으로도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감은 가족이나 동료와 대화를 자주 갖거나 취미생활, 명상 등을 하면서 회복할 수 있다.
망상의 정도가 심하면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
신경증적 망상장애자는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병원 치료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지만 편집증적 성격장애, 망상장애, 정신분열병 환자는 병원에 가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특히 망상장애 환자는 병인지 아닌지가 헷갈리지만 분명 병이다. 미국에서는 경찰, 가족, 고용주 등에 이끌려 병원으로 가지만 국내에서는 병원에 가는 환자가 아주 적다.
피해망상 환자는 그냥 놔두면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이나 살인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치료가 꼭 필요하다. 환자는 뇌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를 조절하는 약을 복용하며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훈련을 한다.
피해망상장애의 경우 환자가 제대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족이 도와주는 방법을 가르치는 ‘가족치료’도 매우 중요하다.
(도움말〓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류인균 교수)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 망상장애 종류도 갖가지
허튼 생각이 한 달 이상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망상장애(妄想障